우리의 펑퍼짐한 아줌마…나의 사랑, 줄리엣 비노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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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오동진의 여배우 열전 - 줄리엣 비노쉬줄리엣 비노쉬는 여배우라기보다는 아줌마이다. 그냥 아줌마. 펑퍼짐한 아줌마. 근데 이상하게도 그게 더 매력이 있다. 자연미가 넘치고 늙어가는 것에 대해 자부심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열패감 따위는 없다. 인생이란 그런 것, 산다는 건 이런 것이란 느낌으로 남들이 쉽게 가지지 못하는 자족감 같은 것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럽다. 이 펑퍼짐한 만족감.
단아하고도 지적인 미모
그에 걸맞은 연기력을 갖춘 명배우
세월이 지나 늙는다 해도
아름다운 배우, 줄리엣 비노쉬
외제니가 잠들어 있을 때 동거 중인 남자 요리사이자 미식가인 도댕(브누아 마지멜)은 그녀의 등 뒤에 앉아 벗은 몸을 한번 쓰윽 훑으며 쓰다듬는다. 그 손길에는 어떤 섹스신이나 베드신보다 더한 뜨거운 욕망이 담겨 있다. 영화 ‘프렌치 수프’의 가장 좋은 장면은 요리를 만드는 씬이나 그것을 먹는 모습이 아니다. 줄리엣 비노쉬의 늙었지만 아름다운 육체의 곡선이 드러날 때이다. 우리 중 상당수는 여전히 줄리엣 비노쉬를 사랑하고 소유하고 싶어 한다. 그녀의 나이 60이다.
오 우리의 퐁네프 다리의 연인이여. 드니 라방은 망가지고 지금은 한낱 조연배우로 만족하고 살지만(2022년에 나온 독특한 영화 ‘가가린’에서 드니 라방은 고물 같은 이미지의 고물상 주인으로 잠깐 나온다.) 퐁네프의 다른 연인 줄리엣은 굳건히, 그리고 올바르게, 무엇보다 비범한 평범함으로 아니 펑퍼짐함으로 스타 자리를 지켜 왔다. 줄리엣 비노쉬가 드니 라방 마냥 무너졌다면 프랑스 영화계가 부서졌을 것이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추락했을 것이며 세계 평화도 위기에 직면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실망과 좌절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무슨 멜로 영화 제목 같은 ‘천 번의 굿나잇’(2014)같은 영화는 줄리엣 비노쉬가 아니면 주인공 역을 맡을 배우가 없었을 작품이다. ‘천 번의 굿나잇’의 레베카는 분쟁지역 전문 사진기자이다. 그녀가 다니는 전쟁 지역은 아프가니스탄일 수도, 시리아일 수도, 레바논일 수도, 가자 지구일 수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목격한 참상들, 특히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눈동자를 잊지 못한다. 그녀는 극심한 우울증이자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중이다. 영화는 비극적이고 슬프지만 차분하다. 영화를 보면서 차분하게, 줄줄, 눈물을 흘리게 한다. 줄리엣 비노쉬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참혹한 세상을 응시하거나 그걸 기억하는 표정 또한 차분하다. 그녀는 사람들을 그렇게 울릴 줄을 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 영화를 줄리엣 비노쉬 영화의 베스트 중 하나로 꼽는 이유이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비노쉬는 간호사 한나 역을 맡아 영국인 화상 환자를 치료한다. 그녀는 헌신적이다. 혼신의 힘을 다한다. 한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간호사는 자신의 환자를 정말 사랑하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인간적으로든 사명감으로든 종교적으로든 인류애 차원이든, 왓에버(whatever) 그렇다. 그건 매우 고래(古來)의 일 같은 것인데 그 옛날 ‘무기여 잘 있거라’의 게리 쿠퍼와 헬렌 헤이스 커플도 그랬고(1932년 판) 록 허드슨과 제니퍼 존스 커플 때도 그랬다(1957년 판).
연합군은 프랑스 남부 전선 어딘가에서 밀리고 한나는 퇴각하는 부대를 떠나보내고 적진 후방에 남는다. 이 환자를 두고 같이 퇴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 부서진 성안에 들어가 병실을 차린다. 무너져 내린 계단을 남겨진 양장본 책으로 이어서 새로 만들기도 한다. 그녀는 밤이고 낮이고 환자를 돌본다. 외롭고 무서울 텐데 오히려 환자 때문에 다 괜찮다는 표정이다.
그녀는 환자에게 책을 읽어 주고 더듬더듬 그의 과거사를 듣는다. 어느 날 알마시는 화상으로 뭉툭해진 손으로 침대 옆 탁자의 모르핀을 하나, 둘, 셋, 넷 하며 한나 앞으로 밀어낸다. 이 모르핀을 모두 한꺼번에 놔 달라고. 이제 그만 세상이 자기를 놔주게 도와 달라고. 한나는 알마시의 말 못 하는 말을 단박에 이해한다. 한나는 모르핀 주사액을 손안에 쥐고 왈칵 울음을 터뜨린다. ‘잉글리쉬 페이선트’의 이 장면은 영화가 어떤 배우에 의해 연기되느냐에 따라 얼마나 그 예술성의 퀄리티가 달라질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비노쉬가 왈칵 울음을 터뜨릴 때 많은 사람은 펑펑 울었다. 이 장면은 『오동진의, 당신이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명장면 101』에 수록될 것이다.
그 남자하고 잔 딴 여자는 남편(기욤 까네)이 있고 아이까지 있으며 남편과 그 남자는 친구 사이이다. 그걸 남자는 또 받아들인다. 개판이다. 마치 지금의 신성(시 하고 있는 봉건 잔재의 자본주의적) 가족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족과 새로운 사랑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얘기처럼 들린다. 매우 프랑스적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가족이나 부부, 커플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에 대한 급진적인 해체와 붕괴 없이 지금의 사회를 고칠 방도는 없어 보이기는 한다. ‘논픽션’에서 줄리엣 비노쉬는 스타 여배우 셀레나 역을 맡는다.
그래서 그러려고 했던 것이 아닌데 메이저가 자신을 원망하는 것을 보고 박사는 어쩔 줄 몰라 한다. 엄마는 이상하게도 아이에게 늘 죄책감을 느끼는 법이다. ‘공각기동대’에서는 비노쉬의 그 모성 연기가 좋다. 무슨 일인지 이 영화에서 줄리엣 비노쉬는 날씬하다. 스타일 있는 박사의 외모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