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에서 모두 잊힌 화가 이쾌대도 서촌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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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이수의 서촌기행1998년 북한에서 근대 화가 총람인 「조선력대미술가편람」을 출간할 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저자 리재현에게 "동무, 지난 시기 창작 공로가 있는 이쾌대 등 미술가들도 놓치지 말고 소개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월북화가 이쾌대가 북한에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이에 따라 펀람에는 <박연 초상>,<송아지> 등 이쾌대의 월북 후 작품 4점이 수록되었다.
잊혔던 월북화가 이쾌대
그가 살았던 '경성 궁정정 163번지'
남쪽에 남아 그림을 지켰던
아내 유갑봉과 이쾌대의 사랑 이야기
그러면 남한에서도 잊힌 존재 이쾌대가 1998년까지 북한에서도 인정을 못 받았단 말인가? 그는 6·25전쟁 당시 월북하여 활동하다가 1959년 김일성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반종파투쟁'의 와중에서 정적들에게 밀려, 친형 이여성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북한에서 위장병을 앓았다는 것을 보면, 숙청으로 맘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병으로 고생하다가 1965년 위 천공으로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5년 이쾌대의 전시회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렸다. 해방 70주년을 맞아 열린《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전시회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1991년 신세계 미술관에서의 첫 번째 전시가 열리고 20여 년이 흐른 뒤였다. 아무 생각 없이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일단 규모 면에서 그의 그림에 압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었다고? 그의 대표작 〈군상1-해방고지(解放告知)〉는 해방의 기쁨을 알린다는 내용의 역사화이다. 그림의 왼쪽에는 해방의 기쁨을 전달하는 여인이 빠르게 뛰어가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일제 강점기 수탈당해 고통스러워하는 남녀의 모습, 사체의 모습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오래간만에 내 소식을 알리게 됩니다. 나의 생사를 모르는 당신에게 이 글월을 보내게 되니... 한민이, 한식이, 아침저녁으로 아버지께 뽀뽀하는 우리 귀여운 수생이 그리고 우리꼬마 한우, 생각할수록 보고 싶소 .... 무엇보다도 한 푼 없는 당신, 무엇으로 연명하는지 .... 아껴둔 나의 채색 등 하나씩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도 돈으로 바꾸어 주리지 않게 해 주시오,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마음은 지금 안방에 우리 집 식구들과 모여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은 걱정하지 말고, 아이들을 위해서 그림이나 화구라도 팔아 가족들 배 주리지 않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였건만, 유갑봉 여사는 남편의 작품을 생명처럼 지켰다. 홀로 남아 주렁주렁 달린 자식을 키우는 여사의 마음이 어땠을까? 남편의 이름조차 금기시되어 평생 '월북화가의 아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설움의 눈물을 남편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을 보며 달랬을 것이다.
남과 북에서 잊힌 존재 이쾌대의 행적을 쫓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북한에서의 행보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해금되기 전까지 이쾌대는 이〇대나 이**등으로 표기되었다. 이름 자체가 금기시된 마당에 작품이 어떻게 살아남았겠는가.
그런 이쾌대가 서촌에 살았었다. 또 다른 월북화가 최재덕이 이쾌대에게 보낸 엽서의 주소가 '경성 궁정정 163번지'로 적혀있다.
"도쿄에 오셨을 때 만나지 못하여 미안하였습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어제 니카카이 전람회를 살펴보고 반입도 끝을 내었습니다. 올해에는 출품 수가 2점이라서 매우 걱정됩니다. ... 저는 29일 게 귀국하겠습니다. 그러면 또(덕)"
궁정정(동) 163번지, 지금은 휑한 길로 뚫려 아무런 흔적도 없는 허공과 같은 곳. 1990년대 초 길이 나버려 이쾌대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1941년 이곳에서 1년 남짓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잠시 살다가 42년부터 신설동으로 이사 갔다.
그는 학교가 파하면 진명여고보까지 자주 찾아갔다. 아마도 멀리서 가방을 들고 유갑봉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데이트 장소는 학교 앞 경복궁 주변이 아니었을까? 진명여고 앞에서 전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을지도 모른다. 경복궁에 있었던 미술관에서 멋진 전시회를 관람했으려나. 그의 아내 사랑은 너무도 유명하여 작품 속에 유갑봉의 모습이 많이도 그려져 있다. <카드놀이를 하는 부부>라는 그림을 보자.
이곳에 둥지를 튼 이유는 그의 형 이여성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서촌에 먼저 자리를 잡은 형이 이곳으로 그를 부르지 않았을까? 이여성은 몽양 여운형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했다. 형과 띠동갑 차이가 나는 이쾌대는 누구보다도 형을 존경했다. 이쾌대 월북 이유 중에는 먼저 월북한 형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2015년 이쾌대의 자화상이 서울의 거리에 나부꼈다. 나부끼는 깃발 속에서 이쾌대가 팔레트를 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조화롭지 않다. 서양 모자 아래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시선은 정면을 응시한다. 자세히 보면 붓은 서예를 그리는 붓이다. 서양화를 그리더라도 민족의 정신은 그림 속에 구현하겠다는 그의 결기가 느껴진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다. 우리 민족은 훌륭한 민족이니 희망이 있다"라고 대답하셨어요. (517페이지) 그러면서 화가는 대중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늘 이야기했다고 전한다.
한이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