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의 무(모)한 도전...AI 작품, 시장이 받아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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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한빛의 아메리칸 아트 살롱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세상입니다. 현대미술이 시작한 이래,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아이디어나 컨셉만으로도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됐으니 당연한 것 아니냐 싶으실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심지어 ‘변기를 사 오는’ 수고 마저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머릿속에 작품을 떠올리고, 이를 텍스트로 달리(Dall·E), 미드저니(Midjourney)나 스테이블 디퓨전(Stable Diffusion)과 같은 이미지 제너레이터에 입력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AI가 작품을 생성하지요. 필요한 것은 좀 더 꼼꼼한 명령어입니다.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지시할수록 완성도 높은 이미지가 나옵니다. 누구나 작가가 된다는 것이 과장이 아닙니다.
크리스티 뉴욕의 AI 아트 경매
온라인 경매로, 3월 8일까지 진행
AI 작품만 모아 진행하는 도전적 시도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와 더불어
저작권법 침해라는 비판에 직면
이렇게 만들어진 AI 이미지가 미술대회에서 상도 받고, 작가들이 작업에 이용하는 것은 벌써 오래전 일입니다. 그런데, 이 AI가 만든 작품을 판매한다면 과연 얼마에 팔릴 수 있을까요? 1차 판매가야 판매자가 정하면 그만입니다만, 시장의 동의가 필요한 2차 시장에서는 어떨까요? 이 흥미로운 시도가 지금 뉴욕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바로 옥션 회사 크리스티의 ‘증강 지능’(Augmented Intelligence) 세일입니다.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경매는 지난 20일 문을 열고, 오는 3월 8일 비딩을 마감합니다.
AI 작품, 얼마일까요?
AI 제너레이터 이미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온라인 플랫폼이 있죠. 현금으로도, 코인으로도 결제가 가능합니다. 디지털 작품이라 원본성을 보증하기 위해 NFT로 민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미술시장에서 AI 작품을 구매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취급하는 갤러리가 적기도 하고, AI를 활용한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판매를 목적으로 한다기보다 커미션인 경우가 많아서입니다. 비엔날레나 미술관 전시를 통해 AI 작품을 소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더 그렇습니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 리스트를 보면 꽤 유명한 작가들이 눈에 띕니다. 지난 2022년 MoMA(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전시 기간을 늘리면서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래픽 아나돌(Refic Anadol), 2024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여한 홀리 허든(Holly Herndon)을 해롤드 코헨(Harold Cohen), 핀다 반 아만(Pindar Van Arman), 매트 드라이허스트(Mat Dryhurst), 알렉산더 레벤(Alexander Reben), 클레어 실버(Claire Silver) 등이 있습니다. 또한 ‘엔비디아 AI 아트 갤러리’(그 엔비디아 맞습니다!) 소속 작가들 작품도 출품됐습니다. 장르도 회화뿐만 아니라 판화, 디지털 원화, 스크린, 라이트박스까지 다양합니다.
출품작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AI를 작품 컨셉의 한 부분으로 활용할 뿐, AI를 통해 뽑아낸 이미지 자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AI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고요. 홀리 허든과 맷 드라이허스트의 ‘스터디 1 & 2’(엑스 헤어리 뮤턴트 엑스-xhairymutantx-시리즈)는 인간과 AI 알고리즘의 진화 관계에 대한 작업입니다.
작가들은 ‘홀리 허든’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빨간 머리, 파란 눈의 백인 여성입니다. 음악과 디지털 아트 분야에서 유명하다는 설정입니다. 여러 차례 텍스트-이미지 AI 프로그램에 학습시키며, 이제는 ‘홀리 허든’이라고 치면 작가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캐릭터를 기초한 변형 이미지가 나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이미지는 또 저장되고 다시 사용됩니다. AI는 ‘휘트니 미술관’같은 사이트를 공신력 있는 곳으로 믿기 때문에, 홀리 허든의 이미지가 쉽게 퍼지는 것도 있습니다. 작가들은 이처럼 인간들이 만들어낸 ‘공신력’으로 AI를 통제하는 셈입니다. 또 동시에 AI에 영향을 받는 인간, 그 사이에서의 창의성에 대해서 질문하죠.
알렉산더 레벤의 작업은 차라리 현대미술 시장에 던지는 비꼬는 농담 같습니다. 입찰가 100달러에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일종의 관객참여형으로, 입찰이 한 번 들어올 때 마다 AI가 1제곱인치씩 작품을 그려 나갑니다. (2월 25일 현재 총 31번의 비딩이 있었고 호가는 4,500달러입니다) 출품작이 전시된 록펠러 센터에는 대형 페인팅 로봇이 설치돼, 캔버스에 작품을 그리고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흔히 만나는) 라이브 페인팅인 셈인데, 입찰액이 178만 달러에 달하면 작품도 최대 사이즈인 12X10피트로 완성됩니다. 사이즈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방식이죠. 그것도 딱 돈을 더 주는 만큼요. ‘호당 가격’이 떠오른 건 지나친 비약이겠죠?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도전의 아이콘 크리스티
미술 경매회사가 AI 아트만 모아 경매에 부치는 것은 이번이 최초입니다. 도전적 시도로 보이는데, 사실 크리스티의 이 같은 실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 2021년 3월엔 미술경매사 최초로 NFT 기술을 적용한 작품을 판매했고, 결과는 무려 6,930만달러(당시 한화 817억원)였습니다. 비플(Beeple)의 작품 ‘매일: 처음의 5000일’(Everyday: The First 5000 days)인데, 5,000일 동안 날마다 그린 디지털 작품을 묶은 것이죠. 이 경매로 비플은 ‘듣보잡’ 작가에서 일약 ‘스타’로 발돋움합니다. 생존 작가 경매 최고가 3위에 랭크됐기 때문이죠.
이보다 앞선 2018년에는 AI가 그린 ‘에드몽 벨라미의 초상화’가 43만 2,500만 달러(당시 한화 약 5억원)에 크리스티 뉴욕에서 낙찰된 바 있습니다. 에드몽 벨라미라는 가상의 인물을 그린 초상화로, 프랑스 청년 3인 그룹인 ‘오비어스’가 개발한 AI 알고리즘이 이 초상화를 탄생시켰습니다. 14에서 20세기 사이 그려진 초상화 1만 5,000여 점을 학습해 이미지를 만들어 냈죠. 화가의 사인 대신 수학 공식이 적혔는데, 제작에 쓰인 알고리즘이었습니다.
크리스티 측은 “이번 경매에 참여하는 작가들이 모두 주요 미술관에서 인정받은 실력 있는 예술가들”이라며 “AI는 단순히 그들의 작품 세계를 확장하는 도구로만 사용됐다”라고 즉각 해명했습니다. 니콜 세일즈 자일스 크리스티 부사장 겸 디지털 아트 판매 이사는 아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증강 지능’ 세일즈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AI가 인간 창의성을 대체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죠. 오히려 인간 창의성의 스펙트럼을 향상시킨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남은 과제, 시장은 과연 받아들일까
갑자기 저작권 도둑질이냐 아니냐, 인간 작가와 작업이라는 결과물에 대한 존중 등 AI 아트의 법적 윤리적 논쟁으로 까지 번졌습니다. 결과는 3월 8일이면 나옵니다. (현재 스코어로는 그닥 희망적이진 않습니다. 비딩이 아예 들어오지 않은 작품들도 꽤 되고, 일부 작품은 시작가에 1회 비딩에 그친 상황입니다) 그러나 결과와 무관하게 AI가 현대미술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매체의 확장이라는 미술의 본질적 특성과 신기술에 대한 작가들의 본능적 욕망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지요.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로요.
이한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