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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눈에 비친 송해의 인생 [고두현의 아침 시편]

노래하는 마음 곁에서
-고(故) 송해 방송인

장재선

세상 고샅고샅 노래를 전하는
삐에로를 자처했으나
그는 망향의 시간을 다스리느라
나날이 면벽한 도인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도통해 청춘으로만 살게 돼
푸른 계절의 빛을 노래에 실어
가을과 겨울에도 마구 퍼트렸다
무거운 세월을 경쾌한 웃음으로 바꾸고
취흥에 겨워서 흔들거리는 척
모든 계절의 곡조를 다 품어주다가
툭, 사라졌으나

지금도 누구 눈에는 그가 보인다
노래하고 춤추며 웃는
그 봄의 마음들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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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노래자랑’을 34년간 진행한 단일 TV 프로그램 최장수 진행자,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계 최고령 TV 음악경연 프로그램 쇼 진행자’, 3년 전 95세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무대 위에서 수많은 사람을 울리고 웃긴 ‘국민 MC’….

‘영원한 현역’으로 불린 방송인 송해의 인생을 장재선 시인이 14행의 짧은 시에 응축해 냈습니다. 장 시인은 문화일보 기자로 오랫동안 대중문화계를 취재하며 스타들의 이면을 가까이에서 보아 왔습니다. 그가 최근 대중문화 스타 37명의 이야기를 담은 시집 <별들의 위로>를 펴내면서 맨 앞에 선보인 작품이 송해의 삶을 다룬 이 시입니다.

송해는 34년간 전국을 누비며 ‘노래자랑’을 진행했지만, 정작 고향 황해도 재령에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시인은 그 안타까운 망향의 사연을 ‘세상 고샅고샅 노래를 전하는/ 삐에로를 자처했으나/ 그는 망향의 시간을 다스리느라/ 나날이 면벽한 도인이었는지 모른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무거운 세월을 경쾌한 웃음으로 바꾸고/ 취흥에 겨워서 흔들거리는 척/ 모든 계절의 곡조를 다 품어주다가/ 툭, 사라졌으나/ 지금도 누구 눈에는 그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바로 ‘노래하고 춤추며 웃는/ 그 봄의 마음들 곁에서’ 말이지요. 이 시는 송해가 생전에 애용하던 서울 지하철 승강장의 스크린 도어에도 적혀 있습니다.

장 시인은 시작 노트에 송해와의 추억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는 생전 반주를 즐겼는데, 그게 건강 비결이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언젠가 그와 통화할 일이 있어서 전화했을 때도 목소리에 취기가 있었다. 남도의 한 지역에서 녹화를 마친 후 한잔했다며 소탈하게 웃었다.” 또 평소의 늘 웃는 모습과는 달리 말 못 할 아픔을 간직하고 살았던 삶을 돌아보며 “그의 웃음 뒤에 있었던 슬픔과 그리움에 한없이 고개를 숙인다”고 썼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송해의 일생은 파란만장했습니다. 1951년 1·4후퇴 때, 인민군을 피해 황해도 재령에서 연평도로 피란 간 그는 미국 군함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해주음악전문학교 성악과에 다니던 음악도가 졸지에 실향민이 됐습니다. 어머니를 비롯한 모든 가족과 생이별한 뒤 바다를 건넌 그날을 잊지 못해 그는 예명을 ‘바다 해(海)’로 지었지요. 이후 본명 송복희 대신 송해의 삶을 새로 일궜습니다.

피란 중에도 그의 ‘끼’는 죽지 않았습니다. 통신병으로 입대한 그는 3군 노래자랑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딴따라’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제대 뒤엔 전국을 돌며 유랑극단 생활을 했지요. 악극단에선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라 관객을 웃기는 바람잡이도 해야 했습니다. 이때의 밑바닥 경험이 연예 인생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1960년대 방송으로 무대를 넓힌 그는 가수와 코미디언, MC를 넘나들며 마음껏 끼를 발산했습니다. 최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87년에는 20세 아들의 교통사고 앞에 무릎이 꺾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일을 접고 실의에 잠겨 있던 그는 ‘전국노래자랑’ MC 제안을 받고 몸과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이후 34년간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며 95세에 현역 최고령 MC로 기네스 기록에 등재됐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지 71년 만이었습니다.

그의 성공 비결은 남다른 프로정신과 현장 제일주의, 체력 관리였습니다. 그는 프로그램에 앞서 철저한 직업의식으로 무장했지요. 녹화 전날에는 해당 지역에 도착해 사투리와 특산품까지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나보다 아픈 사람들에게 위로와 웃음을 주려면 남보다 더한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겐 자동차가 없었습니다. 통신병 출신인 그는 특수차량 면허까지 갖고 있었지만 이동할 때마다 대중교통을 이용했습니다. 운전기사와 함께 ‘닫힌 공간’에 갇혀 있는 것보다 대중과 어울리는 것이 좋다고 했지요. 그 흔한 휴대폰도 없었습니다. 노인용 피처폰마저 “소음 공해만 일으킨다”며 마다했습니다.

방송 현장에 필수적인 큐 카드(대본 등이 적힌 종이)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서였지요. 어쩌다 신인 가수를 소개해야 할 때만 큐 카드를 썼습니다. 그에게는 ‘안티팬’이 없었습니다. 온라인 투표에서 조용필, 현숙과 함께 ‘가장 안티팬이 없는 연예인’으로 뽑혔지요. 댓글도 ‘선플’만 달렸습니다.

연예계의 ‘4무(無) 스타’로 불린 그는 ‘4건(健) 스타’로도 이름났습니다. 그가 밝힌 첫 번째 건강 비결은 버스(B)와 지하철(M), 도보(W)로 움직이는 ‘BMW’였습니다. 그는 서울 매봉역 인근 자택에서 원로연예인상록회 사무실이 있는 종로3가역까지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다녔습니다. 지방 공연 때도 버스나 KTX로 이동했습니다.

두 번째 건강 비결은 목욕이었습니다. 매일 오후 4시 사무실 근처 목욕탕에서 다리와 팔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체내 노폐물을 걸러냈습니다. ‘전국노래자랑’ 녹화 땐 하루 전날 현장에 도착해 대중목욕탕에서 동네 주민들과 어울리며 지역 정보를 공유했지요.

목욕으로 심신을 가다듬은 뒤에는 우거지국밥과 마늘을 즐겨 먹었습니다. 우거지에는 풍부한 섬유질과 칼슘, 비타민A, C, B1, B2 등이 들어 있습니다. 마늘은 묽은 간장에 절인 장아찌를 좋아했습니다. 또 다른 비결은 튼튼한 치아 관리였습니다. 한 달에 두세 번 치과를 방문한 덕에 만년까지 빠진 이가 하나도 없었지요.

95세까지 왕성하게 경제활동을 한 전문가이자 낙관적인 ‘긍정주의자의 꿈’ 또한 삶의 활력소로 작용했습니다. 세계 최고령 MC로 기네스북에 오르고도 겸손해하던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3년이 다 되어 갑니다.

95세 때, 설날 안방극장에서 수많은 이를 울린 그의 노랫가락이 아직 귓가에 맴돕니다. “눈도 맞고 비도 맞고 앞만 보고 달려 왔었네. (…) 괜찮아 이만하면 괜찮아 내 인생 딩동댕이야.”

이젠 그의 목소리가 ‘천국 노래자랑’에서 울려 퍼지고 있을까요. 그곳에서도 여전히 ‘노래하고 춤추며 웃는/ 그 봄의 마음들 곁에서’ 환하게 웃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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