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땀한땀 새기거나, 겹겹이 덧칠하거나…회화가 기억이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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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트 김미경·리스 크랄 개인전
화가에게 캔버스는 추억하는 공간이다. 방식은 제각각이다. 잊어서는 안 될 기억을 숫자나 기호 같은 상징으로 만들어 화면에 새겨넣을 수 있다. 추억이 담긴 물건을 매개체 삼아 강렬한 자극을 유지하는 방법도 있다.
서울 화동 백아트에서 열리고 있는 두 여성 작가의 개인전은 각자의 방식으로 추억을 선보이는 전시다. 1층에서 진행 중인 김미경(61) 작가의 ‘Grain of Time’이 반복과 축적을 통해 기억을 층층이 쌓아 올렸다면, 2층에서 열리는 리스 크랄(88)의 전시는 추억이 담긴 재료로 시간을 감각화한다.
김미경은 불안정했던 어린 시절을 종종 작품의 영감으로 삼는다. 미국 뉴욕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작업 활동을 하는 10여년 간 자신을 뒷바라지 한 어머니라는 존재는 삶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였다.
‘끝나지 않는 노래 I-24(Unfinisished song I-24)’는 어머니의 삶을 추억하는 작품이다. 자신을 포함한 세 명의 형제를 뜻하는 숫자 1, 2, 3과 인체를 구성하는 주요 원소인 탄소(C), 수소(H), 질소(N), 산소(O)를 끝없이 새겨 넣고, 상감기법으로 색을 입혀 마무리했다. 백아트 관계자는 “작가에게 작업은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 존재의 흔적을 남기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리스 크랄은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고 본질로 향하는 수행의 차원으로 회화에 접근하는데, 여기에 종종 자신의 추억을 덧칠한다. ‘04-5’ 작품은 인도 여행에서 수집한 파우더가 칠해졌다. 인도에서 여성들이 이마 가운데나 미간에 칠하는 티카 파우더를 안료에 섞었다. ‘01-17’ 작품은 네팔에서 수집한 청색의 파우더로 완성한 연작 중 하나다.
특히 ‘01-17’은 작품에 활용된 청색 파우더를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터라, 연작의 마침표를 찍는 작품이 됐다. 백아트 관계자는 “여행지에서 마주한 순간과 일상에서 접한 감각이 스며 있는 게 리스 크랄 작품의 특징”이라고 했다. 두 전시 모두 오는 5월 17일까지.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