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 리듬 속 막걸리를 들이켜니…피치 못할 인생의 맛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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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오감 자극 미디어아트로 풀어낸
블루스와 막걸리의 묘한 페어링
발효와 리듬이 만든 시청각 합주
루프랩 부산의 포문 연 전시
국제갤러리 부산, 7월 20일까지
블루스와 막걸리의 페어링. 부산 망미동 복합문화공간 F1964에 자리 잡은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린 정연두(56)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의 풍경이다. 우리 상식 속 막걸리는 한국인의 리듬이고 버번은 흑인 음악의 증류된 기억이다. 어떤 피치 못할 일이 있었길래 블루스와 메주, 막걸리를 한 장소에 묶어 놨을까.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정연두는 이렇게 답했다.
“세상 모든 게 썩어 없어진다고만 생각하면 얼마나 삭막하겠어요. 가끔은 상큼한 향을 내는 알코올로 되살아난다는 게 막걸리의 매력이죠. 블루스도 흥겨워서 만든 음악은 아니지만 슬픈 얘기를 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아요. 그런 지점에서 발효와 블루스를 연결해본 거죠.”
세계적 미디어 아티스트로 꼽히는 정연두의 예술은 원래 이런 식이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그는 타인과 만나 대화하고 협업하는 관계적 방법론을 따지면서 예술과 삶을 넘나드는 문지방을 만들어왔다. 다름과 닮음이 공존하는 자연의 섭리를 익살스럽게 전환하는 것.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2007)로 선정되고, 작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30주년 전시에 작품을 선보이고, 리움미술관과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한 건 바로 이런 톡 쏘는 예술세계를 인정받은 결과다.
정연두의 시선으로 다시 보면 막걸리와 블루스는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아래에서 올라온 예술이란 점이 그렇다. 흑인 노동자의 노동요가 블루스라면 막걸리 역시 농사짓는 이들의 농주였다. 블루스는 고통을 즉각 분출하는 대신 천천히 삭혀야 완성된다. 막걸리 역시 누룩, 물이 하나 되는 보이지 않는 시간을 거쳐야 한다. 귀로 듣는 발효가 블루스라면 입으로 마시는 발효가 막걸리인 셈이다.
정연두는 발효 과정을 시각적 리듬으로 치환했다. 전시에 흘러나오는 작품 ‘피치 못할 블루스’는 한국에 정착한 고려인의 이야기로 지은 곡이다. 핏줄은 한국인을 외치지만 현실은 몇 번의 강제 이주를 거쳐 외국인이 된 경기 안산에 사는 고려인 청소년들의 사연을 엮었다.
블루스가 엄격한 구조 안에서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연주를 허용하는 것처럼 막걸리는 일정한 온도와 시간, 재료 조건 아래 발효라는 자율적인 생명 활동으로 만들어진다. 피치 못할 블루스를 합주하는 연주자들은 12마디 구조와 67bpm이라는 조건만 숙지한 채 서울과 미국 보스턴 등에서 따로 연주했다.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이라는 전시 제목과 걸맞게 F1964를 비롯한 부산 전역에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 ‘루프랩 부산’이 열리고 있다는 점도 재밌다. 당초 루프랩 부산을 염두에 두고 전시를 기획한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정연두의 전시가 다채로운 미디어아트를 소개하는 페스티벌의 포문을 열었다. 전시는 오는 7월 20일까지.
부산=유승목 기자 mok@www5s.sh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