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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예권의 마침표 없는 연주, 쉼표 같은 고백

[리뷰] 지난 5월 2일
뉴욕 카네기 젠켈홀에서 열린
선우예권 리사이틀

16년 만에 다시 서는 무대
슈만부터 라흐마니노프까지...

R. 슈만 '환상곡'
F. 쇼팽 '뱃노래'
C. 슈만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S. 라흐마니노프 '악흥의 순간'
R. 슈만 '리스트, 헌정'
C. 드뷔시 '달빛'
‘삼대장’이라 불리며 자주 언급되는 한국 남성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 선우예권은 각기 뚜렷한 개성과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한 아티스트들이다. 세 사람 모두 권위 있는 국제 콩쿠르 입상을 통해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조성진은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선우예권은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역시 한국인 최초로 정상에 올랐다. 그 뒤를 이은 임윤찬은 이 대회 최연소 우승자라는 기록을 세우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세 명 가운데 맏형 격인 선우예권은 어린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커티스 음악원을 시작으로 줄리어드 음대와 매네스 음대에서 수학한 뒤, 독일 하노버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감성의 깊이와 명확한 구조, 세련된 음색이 조화를 이루는 연주로 잘 알려진 그는, 이번에 16년 만에 한국음악재단(Korea Music Foundation)과 한국메세나협회(Korea Mecenat Association)의 후원으로 지난 2일 미국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다시 섰다.
5월 2일, 선우예권 카네기홀 리사이틀 / 사진. ©Nam Chung Park
그는 낭만주의 대표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첫 곡 로베르트 슈만의 C장조 환상곡은 낭만시대의 대표작으로, 슈만이 프란츠 리스트에게 헌정했다. 슈만의 틀을 깨는 화성의 진행, 목표점까지 이르기까지 결코 쉽게 가지 않는 작곡가다. 그래서 음악은 복잡하며 까다롭고 경계와 한계가 또렷하다.

선우예권의 연주는 꾸밈이 없고 담백하다. 무대 위에서의 모습 역시 과장되거나 동작이 극적이지도 않다. 그가 연주하는 모습만 봐서는 작품의 극적인 흐름이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옆자리에 앉아있던 2017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앤 마리 맥더모트(Anne-Marie McDermott)역시 한동안 눈을 감은 채 그의 연주에만 몰입했다. 선우예권은 슈만이 클라라에 대한 사랑과 음악적 동경을 담은 이 작품을 경계가 분명하고 정해진 틀 안에서 노래하고, 속삭이고, 폭발하며 각 악장의 뚜렷한 감성을 드러냈다.
5월 2일, 선우예권 카네기홀 리사이틀 / 사진. ©Nam Chung Park
쇼팽의 후기 작품인 ‘바르카롤(Barcarolle)’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곤돌라 노래에서 영감을 받았다. 녹턴, 발라드, 마주르카 등 다양한 형식의 걸작을 남긴 쇼팽이 바르카롤 형식으로 쓴 곡은 이 한 편뿐이다. 피아니스트에게는 고도의 섬세함과 정밀한 컨트롤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곡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 아닌 내면의 서정으로 은밀히 스며들게 접근해야 하는 작품이다.

디지털 기술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아날로그처럼 구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완전무결한 테크닉이나 기계처럼 정교하게 조작된 음색은 선우예권의 연주와는 거리가 있다. 그의 음악은 아날로그이다. 일일이 수작업을 거친 장인의 작품처럼, 음원이나 CD보다는 물리적 마찰로 소리를 내는 LP에 가깝다. 선우예권은 잔잔한 물결 위를 천천히 미끄러지는 곤돌라의 선율에 짙은 우울과 체념을 담아냈고, 그 소리에는 손끝의 결이 느껴졌다.

클라라 슈만의 ‘로베르트 슈만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Variations on a Theme by Robert Schumann)’은 한 사람의 사랑과 고통, 그리고 이별의 예감이 고밀도로 녹아 있다. 1853년, 클라라는 남편 로베르트의 43번째 생일을 맞아 남편이 1841년에 작곡한 F♯단조 주제를 가지고 이 변주곡을 작곡하여 선물했다. 선우예권은 이 작품을 단순한 헌정곡으로만 다루지 않았다. 작품에 내재된 정서의 무게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과장을 걷어내고 담백하게 풀어냈다. 소중한 누군가가 건네는 이야기처럼 선우예권의 노래는 건반을 타고 흐르며 클라라의 남편을 향한 헌신과 상실의 슬픔이 더 깊게 울려 퍼졌다.

톨스토이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처음 읽기 시작하면 한동안 중심이 보이지 않는다. 등장인물이 늘어나고, 각각의 시선을 가진 형제들의 이야기가 점입가경을 이루며 겹겹이 쌓여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나의 비극을 중심으로 모든 인물의 말과 침묵, 신념과 상처가 선명한 구조를 이루며 전체 서사가 들어온다.
5월 2일, 선우예권 카네기홀 리사이틀 / 사진. ©Nam Chung Park
선우예권의 이번 카네기홀 리사이틀도 그러했다. 일반 대중에게는 다소 장벽처럼 느껴질 수 있는 진지한 프로그램이었고, 소위 귀에 ‘꽂히는’ 장치 없이 오직 내면의 흐름과 음악적 서사를 따라갔다. 그러나 이 모든 선택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긴 호흡으로 끝을 바라보기 전에는 그 구조가 보이지 않지만, 슈만의 환상곡에서 출발한 여정은 쇼팽과 클라라를 거쳐, 마침내 여섯 개의 소품으로 구성된 라흐마니노프의 ‘악흥의 순간(Moments musicaux)’에 이르러 안개가 걷히듯 거대한 서사의 윤곽을 드러냈다.

라흐마니노프는 삶이 순탄치 않았던 작곡가였다. 전쟁을 겪었고 극심한 재정적 압박 속에 살았다. 초기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은 단 두 달 만에 완성된 곡으로, 피아니스트였던 그의 다양한 스타일과 정서를 압축해 담았다. 2023년 선우예권이 내놓은 음반에도 수록된 이 작품은 슈베르트가 작곡한 같은 제목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슈베르트의 영향이 짙게 느껴진 녹턴 풍의 1번을 지나 쇼팽이 연상되던 2번에는 선우예권은 휘몰아치는 속주 위에 굳건히 버티는 주제 선율을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장송곡 풍의 3번에서는 비극적인 슬픔을 무겁고 장중하게 담은 러시아적 정서를 절절히 그렸다.

빠른 템포의 에튀드인 4번에서 선우예권은 시종일관 긴장감과 격렬함을 밀도 있게 끌고 나갔다. 왼손 옥타브의 질주와 반복 음형은 쇼팽의 에튀드 Op.10의 12번 ‘혁명’을 떠올렸고, 기술적 난이도를 뛰어넘는 격정적 클라이맥스를 폭발시켰다. 4번이 끝나자 공연 내내 숨죽이던 일부 관객들 사이에서 낮은 탄성과 함께 성급한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5월 2일, 선우예권 카네기홀 리사이틀 / 사진. ©Nam Chung Park
마지막 6번, C장조 마에스토소(Maestoso)에서는 장엄하고 위풍당당한 캐논과 대위법의 향연이 펼쳐진다. 선우예권은 강렬한 포르티시모로 시작해 부드러운 구간을 지나 다시 극적인 고조로 작품을 끌고 나갔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라흐마니노프를 “나를 따뜻하게 하는 작곡가”라고 말했다. 단순히 고난도의 작품을 마지막에 배치해 화려함을 더하려는 전략적 선택을 뛰어넘어, 피아니스트로서의 그를 존재하게 만드는 가장 근원적인 감각에 닿아 있음을 말해준다.

몇 번의 커튼콜 끝에 그는 두 곡으로 마지막 이야기를 대신했다. 리스트가 편곡한 슈만의 ‘헌정(Widmung)’에서는 사랑과 헌신을 고백했고, 드뷔시의 ‘달빛(Clair de lune)’에서는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비추는 은빛 침묵을 남겼다. 뜨거움보다 깊은 여운으로, 선우예권은 말 없는 인사를 건넸다.

뉴욕=김동민 뉴욕클래시컬플레이어스 음악감독·아르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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