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엔 펍세권 있다…"퇴근길 나를 위로하는 수다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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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안식처, 영국 펍을 가다
런던에 사는 영국인 친구 제임스의 말이다. 그것도 아주 진지한 말투로. 그의 집은 하이드파크 근처 빅토리아풍의 흰색 5층 건물이 줄지어 선 고급 주택 단지에 있었다. 그는 집값이나 구조, 크기를 고려하면서도 집에서 도보 5분 내 펍이 있는 곳을 추렸다고 했다. 펍과 하이드파크가 동급이라니, 영국인에게 펍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펍과 공원. 한국인에겐 ‘마트’와 ‘역세권’만큼 중요한 키워드다. 직접 곁에서 본 영국인의 삶 속 펍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었다. 그들이 거친 삶을 버티는 유연한 방법, 사람들과 이야기를 함께 써온 역사적 공간이었다. 흑사병, 런던 대화재, 독일의 대공습 같은 재앙 속에서도 펍은 살아남았고, 지금은 영국을 상징하는 특별한 곳이 됐다. 그들 삶에 펍이 얼마나 특별한지, 현대 영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시인 새뮤얼 존슨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선생.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 좋은 술집만큼 많은 행복을 주는 것은 아직 없습니다.”
퇴근길 리추얼, 동네 소셜 허브
늦은 오후, 퇴근 시간쯤이면 주요 펍은 붐비기 시작한다. 영국인은 일을 마치고 집에 가기 전 펍에 들러 맥주 및 음료를 마시며 이웃이나 친구와 가볍게 수다를 떤다. 자리에 앉는 사람보다 서서 마시는 사람이 많다. 술집 밖 골목 쪽 창틀에도 소소한 선반을 마련해 뒀다. 술집 밖 골목까지 맥주 파인트 잔을 들고 약간 달아오른 얼굴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로 왁자지껄하다.
맥주는 분위기를 거들 뿐.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대화’다. 그렇게 하루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날려버리고, 집으로 향한다. 펍에 들르는 건 일종의 퇴근길 의식이자 정서적 교감을 하고, 휴식하는 시간이다. 영국인은 낯선 사람과의 어떤 대화도 가능한데, 펍에서는 유난히 활발하다. 동네 모퉁이 곳곳에 자리 잡은 펍은 ‘오프라인 소셜 허브’로 기능한다.
‘술자리’라고 하면 한국인은 흔히 거하게 차린 술상을 떠올린다. ‘부어라, 마셔라’ 하는 와중에도 위계와 예의는 눈치껏 챙겨야 한다. 이윽고 2차, 3차를 거치며 만취해서 늦은 밤에야 겨우 집에 들어간다. 이에 비해 영국의 펍은 가볍다. 한낮에도 직장인들이 맥주 한 잔, 와인 한 잔을 놓고 서류를 검토하는 모습이 흔하다. 많은 ‘비즈니스’가 이뤄지는 한국의 술 문화와 비교하면 훨씬 캐주얼하다. 안주가 없고, 밤낮이 없으며, 만취도 (거의) 없는 가벼운 놀이. 영국인이 일상의 무게를 덜어내는 휴식 문화다.
누구에게나 열린, 퍼블릭 하우스
20세기 이후 펍은 더욱 대중적인 공간으로 확장됐다. 친구와 직장 동료, 때로는 가족과 함께. 아니면 혼자 와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낮에는 아이들과 햄버거 및 피시 앤드 칩스를 먹기도 하고, 일요일 교회 후 들르는 선데이 로스트 맛집도 된다. 축구 관람, 음악회, 코미디 클럽, 퀴즈게임, 파티 등이 열리기도 하는 복합 공간. 영국의 펍은 카페, 식당, 술집의 개념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실상 뭐든 가능한 공간이다.
스탠딩, 셀프 주문, 노팁
“선술집의 의자는 행복의 왕좌요, 그 문을 들어서는 순간 걱정과 외로움에서 해방된다.” 존슨의 말처럼, 펍은 영국인에게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마음의 안식처다. 매년 런던을 찾는 2000만 명의 방문객 중 상당수가 이 특별한 분위기를 경험하기 위해 펍에 들른다. 펍이 영국이고 영국은 펍이기 때문이다.
영국인은 실제로 펍을 제2, 제3의 또 다른 집으로 인식한다. 펍의 내부 인테리어도 이를 반영해 최대한 집처럼 꾸민다. 내부는 목재 소재의 가구, 카펫과 벽난로로 채워져 있다. 벽면 곳곳에는 사진이나 그림 액자가 걸려 있고 아늑한 주황빛 조명이 아늑함을 더한다.
펍에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건 셀프 주문. 주문은 바(bar)에서 직접 해야 한다. 술이나 음료를 제조하는 직원이 바에 상주하고, 웨이터는 없다. 자리에 앉아서 직원을 부르다간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 있다. 자리가 없다고 당황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서서 마시는 문화가 일반적이다. ‘라운드(round)’ 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 함께 간 일행과 술이나 음료를 돌아가면서 사는 것. 내가 한 번 맥주를 사면, 그다음엔 다른 사람이 결제하는 식이다. 때로는 바 직원에게 음료를 사주는 것으로 팁 문화를 대신한다.
런던=조민선 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