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서 걷다가 더없는 행복을 만난다, 광기의 영감에서 관계 맺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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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서울시발레단×요한 잉거
벽 사이에서 인간을 읽는다
오는 18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무대는 요한 잉거의 대표 안무작 두 편으로 구성되었다. 첫 무대를 장식한 <워킹 매드>는 소리에 대한 이미지가 정형화되다시피 한 음악을 안무가가 어떻게 춤을 관통시키며 해체하고 재조립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워킹 매드>를 이끈 주요 음악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이다. <볼레로>는 두 개의 주제 멜로디를 중심으로 악기들이 소리가 하나씩 더해지고 반복되는 단순한 구조를 갖고 있다. 점진적으로 쌓인 그 소리들은 마지막 순간에 폭발한다. <워킹 매드>의 움직임은 그 소리가 명령하는 구도에 따라가지 않고 전혀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연극적 요소를 입혀 단순한 리듬 사이에 복잡한 인간의 감정을 촘촘하게 끼워 넣은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요한 잉거는 몇 가지 예술적 전략을 펼쳤다. 가장 주요한 건 무대세트로 사용한 거대한 벽이다.
<워킹 매드>에서 벽은 단순히 서 있기만 한 사물이 아니다. 이동하고 접히고 바닥에 눕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무대를 구획 짓고 동시에 무대를 확장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이끈다. 거대한 벽 하나가 텅 빈 무대를 다면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더 중요한 점은 이를 통해 다양한 인간사와 감정을 담아낸다는 점이다. 특히 벽에는 몇 개의 문이 있어서 그 문 사이로 무용수들이 오가며 내밀한 인간의 감정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여기에 더해 빨간색 고깔모자와 중절모, 입고 벗는 외투는 시간의 흐름과 삶의 모습들을 비춘다. 문을 오가고, 벽을 넘고, 벽을 쓰러트려 그 위를 밟고, 벽에 기대며 농밀한 감정의 표현에 방점을 찍으면서, 결국 ‘벽’을 통해 익숙함이란 ‘벽’을 넘는다.
춤이 애초에 이 음악이 갖고 있던 '응당 이렇게 되어야 할 결론'을 지워버리고 관객의 감정선을 다른 심연으로 끌어들였다. 앞부분은 마치 <알리나를 위하여>를 통해 전개되는 마지막 2분 남짓의 춤을 보기 위한 긴 전반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여기서 객원 수석무용수로 함께한 이상은 무용수가 벽 앞에 마지막 남은 자로 그 음악의 잔상을, 춤의 여운을 담당했다. 전반적으로 이 작품 속의 무용수들에게 감탄했던 건, 기술적으로 난도 높은 움직임이 꽉 차 있고 호흡의 사용이 만만치 않은 이 작품에서 그 기술이 아니라 감정에 집중할 수 있게 무대를 이끌었다는 점이다.
<블리스> 역시 음악에 대한 해석이 빛난 작품이었다. <워킹 매드>가 익숙한 볼레로 음악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해주었다면, <블리스>는 키스 재럿의 <쾰른 콘서트>를 통해 재즈 음악이 갖는 즉흥성, 난감한 상황에서도 연주회를 빛으로 끌어낸 그때 그곳의 분위기를 기억하며, 소리와 역사를 통과해 그 통로 끝에 춤이라는 이미지로 전사(轉寫)한 작품이다. <블리스>를 통해 춤으로 재현된 <쾰른 콘서트>의 전설은 공연의 환희가 무엇인지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블리스>를 통해 청각은 영감을 지나 시각이 되고, 그것은 다시 영감이 되면서, 지성적 프리즘이 아니라도 누구라도 이 춤의 환희에 빠져들 수 있게 만든다.
<워킹 매드>와 <블리스>는 전혀 다른 색깔의 작품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광기, 그리고 관계 맺음이다. 요한 잉거는 반복적인 <볼레로>의 리듬에서 일종의 광기를 읽어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음악의 연극성과 광기가 영감을 주어 연극적 흐름과 에너지의 광기를 담은 <워킹 매드>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광기'는 고대부터 중요한 지점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플라톤은 희곡처럼 대화 형식으로 글을 써서 그의 저서들은 '대화편'이라고 불리는데 그 중 중기대화편 『파이드로스』는 사랑과 아름다움과 진리에 대해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젊은 파이드로스의 대화를 담고 있다. 이 대화편에서는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좋은 것들은 대부분 신이 주는 광기에서 온다"고 말한다. 이번 무대는 광기가 어떻게 신의 선물이 되었는지 보여주었다. <워킹 매드>에서는 광기가 삶 속에 깊이 개입했다면, <블리스>의 경우 그 광기로 화사한 환영을 만들어냈다. 전설로 기억될 정도로 빛을 보여준 한 연주가 안무가에게 환한 광기를 전염시켰고, 그 광기가 무용수의 몸과 에너지를 통과해 관객에게 흐른 무대였다.
이단비 무용칼럼니스트·<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