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미술사 최악의 스캔들 '마담X', 40년 만에 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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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뉴욕 아트위크를 가다]
미국인이자 노마드였던 초상의 대가 존 싱어 사전트
서거 100주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기념전
미국인 부모 밑에 피렌체 태어나 18세에 파리로 이주
10년간 파리 예술계 '스타 초상화가' 자리매김
미국계 고트로 부인 그린 파격적 초상화 '마담 X'
"퇴폐적" 오명에 런던으로 도망치듯 떠나 69세 영면
"이것은 나의 걸작" 30년 간직하다 메트미술관에 팔아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오르세미술관 공동 기획
8월 3일까지 뉴욕서, 9월부터 오르세 미술관으로
미국인이자 동시에 세계인이었던 ‘초상의 대가’ 존 싱어 사전트(1856~1925)가 스물 여덟 살에 그린 한 여인의 모습이다. 지금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사전트X파리>는 18세에 파리 미술계에 입성해 그가 10년간 쏟아낸 작품들과 그 시기 유럽 아프리카 대륙을 방랑하며 그려낸 최고 걸작 100점을 회고한다. 올해는 그의 서거 100주년이다.
존 싱어 사전트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미국인 부모 밑에서 1856년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풍족하게 자란 그는 18세가 되던 해(1874년) 학생 신분으로 파리에 간다. 당시 파리는 보불전쟁과 신정부 수립 이후 유럽 미술계의 중심지로 변하던 때다. 음악과 미술을 사랑한 사전트는 파리 사교계의 문화 생활에 흠뻑 빠져든다. 루브르 박물관의 웅장한 고대 유물도, 인상파 화가들의 아방가르드 그림도 그에겐 온통 매력으로 다가왔다. 여러 언어에 능통했던 그는 예술가, 작가, 후원자 사이를 누비는 사람이기도 했다. 사교성이 뛰어났고, 카리스마가 넘쳤다.
방랑벽도 유난했다. 사전트는 방학 때마다 여행하며 보냈다. 그는 종종 미국인으로 묘사되지만, 어느 한 국가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등 프랑스 해안 근처에서 영감을 얻었고, 스무 살에 처음 미국으로도 향했다. 그는 당시 인기 있었던 지역의 사람들, 건축물, 그리고 바다 풍경을 주로 주제로 삼았다. 프랑스 남부 바닷가 깡깔에서 굴을 채집하는 사람들(1877년), 이탈리아 카프리 해변의 풍경과 춤추는 여인들(1879년),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과 모로코의 풍경화(1879-1880년), 베네치아의 건축물과 골목길과 인물들(1880-1882년) 등을 보자. 여행이 쉽지도 않았을 그 시기 사전트가 얼마나 많은 모험을 했는 지 알 수 있다. 그 여행은 모두 그림을 위한 공부였다. 빛과 표정을 역동적으로 잡아낸 그림에선 사람과 자연에 대한 순수하고 따뜻한 시선과 예리한 관찰력이 교차한다.
고전과 현대를 넘나든 재능
파리 살롱에서 상을 받아든 그는 이듬해 스페인과 모로코를 잇는 긴 여행을 떠난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모사하기 위해 마드리드로 예술 순례를 다녀온 후, 남쪽 모로코로 이동해 음악과 춤에 대한 열정을 즐기며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베네치아만큼 그를 사로 잡은 이탈리아 도시는 또 없었다. 1880년과 1882년에 걸쳐 긴 시간 베네치아에 머문 그는 수 많은 스케치와 유화를 남겼다.
1880년대 초 사전트는 파리 스튜디오에 머무는 시간을 늘렸다. 대중적인 경력을 쌓기로 결심한 뒤 야심찬 그림들을 그렸다. 주로 친구와 지인, 예술계 인사와 후원자들의 초상화였다. 그는 수십만 명이 모이는 파리 살롱에서 인정 받을 만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한 프랑스 작가는 1881년 그의 초상화를 두고 “지나가는 순간 당신을 끌어당기고, 매료시키고, 흥미를 유발하는 보기 드문 재능”이라고 썼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수천 점의 그림이 걸리는 파리 살롱에서 그야말로 극찬을 받았다. 그의 작품들은 유럽 전역은 물론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도 인정 받았고, 더 많은 초상화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전트는 1882년 파리 살롱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샤를로트 부르크하르트의 초상화와 스페인 플라멩코를 강렬하게 묘사한 기념비적인 ‘엘 할레오’는 그를 “파리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화가”로 만들었다.이듬해 또 다른 걸작을 내야하는 압박에 고민하다 그려낸 미국인 친구의 아이들 그림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1882)은 또 한번 그를 정점에 올려놓는다.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 에드가 드가와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에 대한 탐구가 집약돼 극적인 빛과 그림자가 대비되는 현대적인 초상화로 탄생했다.
그는 파리 예술계 네트워크의 중심이 됐다. 자연스레 초상화가로서의 경력도 꽃을 피웠다. 특히 여성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화가로 명성을 떨쳤는데, 파리의 예술계와 문학계, 상류사회 여성들과 우정을 맺어 작품 의뢰가 쏟아졌다. 전시장에 걸린 초상화들은 사전트가 당시 얼마나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는 지에 대한 증거다.
1884년 파리 살롱, 조롱거리가 되다
19세기 후반 파리의 세련되고 현대적인 여성, 소위 ‘파리지엔느Parisienne’는 프랑스 사회의 관심을 끌며 해외로도 퍼져 나갔다. 세련되고 세속적이면서 동시에 고상하고 우아한 여성을 지칭하며 마치 프랑스의 국가적 자부심처럼 여겨졌다.
‘마담X’ 스캔들은 이런 분위기와 연관이 깊다. 그림의 모델은 비르지니 아멜리 아베뇨 고트로(1859-1915). 당시 파리에서도 유명한 사교계 인사였다.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프랑스계 부모 사이에 태어나 어린 시절 파리로 이주해 1879년 프랑스 은행가와 결혼한 여인. 매력적인 외모의 그녀를 사전트는 1884년 파리 살롱에 출품할 작품의 모델로 직접 골랐다. 온갖 인맥을 동원해 섭외했다. 좀처럼 초상화를 맡기지 않았던 고트로는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가 자신을 그려준다는 말에 크게 환영했다고. 사전트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겠지만) 미스터리한 작품명을 달아 파격적 작품을 내고 싶었고, 출품명을 ‘마담***’으로 달았다. 고트로 역시 작품이 완성된 직후 “이 초상화는 ‘걸작’이다”고 평했다.
화가 사전트와 모델 고트로의 큰 기대를 안고 ‘마담***’는 1884년 파리 살롱에 걸린다. 2488점의 그림 중 하나로 31번 갤러리에 전시됐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온갖 비난과 조롱이 쏟아졌다. 매부리 같은 뾰족한 콧날에 가느다란 눈을 한 옆모습과 석고처럼 창백한 피부, 깊게 파인 검정 드레스 위에 목은 지나치게 여인의 초상. 무엇보다 어깨끈이 살짝 흘러내린 오른쪽 팔(지금은 어깨끈이 제 위치에 가있다)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뒤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지엔느의 소위 ‘벌거벗은 모습’은 관람객들에게 충격을 줬다. 유명 인사였던 고트로의 도덕성에 대해서도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실제보다 더 못생기게 그리는 초상화가”라는 모욕적인 말이 평단과 대중들 사이에 퍼져 나가자 그림이 걸작이라고 평했던 고트로마저 어머니와 함께 그를 찾아와 울면서 그림을 당장 내려달라고 했다.
그의 그림을 아무리 다시 봐도 혹평에 시달릴 그림은 아닌데 그때의 파리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당시 파리 사교계는 겉으로 귀족적이고 고상한 분위기를 한껏 풍기면서 매춘과 불륜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때였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쉬쉬하던 사실을 이방인이었던 사전트가 일부러 ‘퇴폐미를 가진 부유한 여성’을 그려 적나라하게 고발한 것으로 프랑스인들은 해석했다. 르 피가로는 당시 “한 번만 몸을 비틀면 그 여인은 자유로워질(옷이 다 벗겨질) 것”이라고 평했고, 미국 문화사학자 폴 피셔도 “비록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전트의 마담X는 파리 시민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자신들의 퇴폐적인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썼다.
절망한 사전트는 29세에 런던으로 이주해 1925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파리에서의 스캔들이 워낙 파급력이 컸기 때문에 영국에서의 초기 평판도 악화된 상황이었지만, 그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곧 재기에 성공했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시어도어 루스벨트, 우드로 윌슨도 그에게 초상화를 맡겼고, 당대 가장 비싼 초상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사람들은 그를 “우리 시대의 반 다이크”라고 불렀다.
벼랑 끝으로 내몬 그것 “내 생애 최고의 걸작”
사전트는 파리를 떠났지만, 떠나지 않았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가 된 그는 파리에서 계속 전시를 열었고, 파리에 자주 갔다. 모네에겐 “파리가 나를 잊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도 했다. 파리에서 보낸 10년이 그의 모든 예술적 영감과 테크닉, 인간관계를 만들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평생 간직한 셈이다. 프랑스 정부도 그가 파리를 떠난 지 한참 지난 1892년 그의 초상화 ‘라 카르멘시타’를 구입하며 화해의 손길을 건넸다. 이 작품은 프랑스 정부가 구매한 최초의 미국 화가 작품이기도 하다.
“제가 그린 고트로 부인의 초상화는 현재 미국에 있으니, 박물관에서 원한다면 그곳에 두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제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1000파운드에 팔겠습니다.”
올해는 사전트의 서거 100주년.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파리 오르세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이 전시는 오는 9월, 사전트에게 인생 최악의 굴욕을 안겼던 도시이자 그가 가장 사랑했던 파리로 옮겨간다. 프랑스에서 열리는 사전트의 첫 단독 전시이자, ‘마담X’가 40여년 만에 처음으로 프랑스로 건너가는 사건이다. 뉴욕 전시는 8월 3일까지, 파리 전시는 9월 23일부터 2026년 1월 11일까지다.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 비평가들은 이 전시를 어떻게 해석할까. 뉴욕=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