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가수 이은하가 재즈 앨범을 내놓은 게 있다. 2012년에 내가 프로듀서를 맡은 것으로, <My Song My Jazz>라는 제목으로 발매됐다. 음반 프로듀서란 가수와 연주자들에게 레퍼런스를 제시하고 음악의 방향을 끌고 나가는 역할이다. 당시 나는 호방하면서도 허스키한 그녀의 음색이 재즈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밤차’ ‘봄비’를 부른 국민가수가 재즈를 부른다면 충분히 화제가 될 거라 생각했다. 대중에게 재즈를 알리는 목적에도 부합했고 가수 본인에게도 용기를 낸 도전이었다.
외국의 경우 유명 팝가수가 재즈에 도전하는 사례가 흔하다. 로드 스튜어트나 베리 매닐로우가 스윙빅밴드를 배경으로 재즈 넘버를 부른다. 전성기는 한참 지났지만, 반백의 머리에 중후한 음성으로 재즈 리듬을 타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듯하다. 그래서 재즈는 나이가 들수록 멋지게 즐길 수 있는 음악이다. 한번은 댄스 가요를 부르던 한 여가수가 나에게 말했다. “저도 나중에는 재즈를 하고 싶어요. 언제까지 춤추는 노래를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고는 공부를 많이 하겠다고 덧붙였다. 요즘 그녀는 재즈밴드와 공연하고 싱글을 발표하는 등 뜻한 바를 이루어가는 중이다.
가수 이은하 / 사진=필자 제공
이은하는 내가 어린 시절부터 TV 화면으로 보던 베테랑 가수다. 편의상 이름 석 자로 글을 쓰고는 있지만 까마득한 선배인 만큼, 조심스럽게 예를 갖춰 녹음을 진행했다. 그런데 팝가수를 재즈로 초대하는 일이 간단치만은 않았다. 예컨대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악보에 적힌 음정대로 (정확하게) 노래한다면 재즈는 좀 더 자유롭게 페이크(fake)시켜 장식적인 변화를 더하는 게 다반사다. 이는 블루스 음악에서 유래된 것으로, 멜로디에 즉흥적인 감정을 살리는 방법이다. 경험 많은 이은하도 녹음 초반에는 이것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던 그녀는 “내 노래에 대해 얼마든지 편하게 주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스태프들의 긴장을 풀어준 후 하나하나의 의견을 수렴해갔다. 그리고는 점차 능숙한 호흡으로 재즈적인 감정표현을 소화해냈다.
이은하표 재즈 중에 백미는 ‘마이 퍼니 밸런타인(My Funny Valentine)’이다. 재즈 거장 쳇 베이커의 버전으로 유명한 스탠더드 넘버다. 한번은 내가 출연한 라디오프로그램에서 진행자였던 손석희 씨가 이 곡을 들어보더니 “내가 아는 마이 퍼니 밸런타인 중에서 최고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녹음 과정에 우여곡절이 있었던 터라 더 기분 좋은 칭찬이었다. 원래 이은하는 이 곡을 부르지 않겠다고 했다. 원체 시원하게 지르는 샤우터 가수인데 너무 낮은음으로 읊조리는 스타일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반드시 불러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고, 며칠간 긴장감이 흘렀다. 스튜디오에서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결국 ‘마이 퍼니 밸런타인’을 빼고 모든 녹음 일정을 마무리하던 날, 이은하는 맛난 햄버거 세트를 잔뜩 사 들고 와서 수고한 스태프들에게 조촐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러더니 ‘마이 퍼니 밸런타인’을 집에서 연습했다며 오늘 녹음하자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이은하 - My funny valentine]
그게 어느덧 13년 전 겨울의 일이다. 그 시절 하루치 녹음이 끝나면 연주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거나 카페에서 맥주 한 잔씩 하고는 했다. 그때마다 이은하는 음식을 먹지도 않고 술도 입에 대지 않으면서 꼬박 자리를 지켰다. 그러면서 엉뚱하게도 뜨개질을 했다. 커다란 실타래를 무릎 위에 얹고 대바느질을 했다. 술자리에서 뜨개질이라니...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되자 직접 만든 목도리를 우리에게 선물했다. '이은하'라는 이름이 수놓아진 목도리였다. 나에게 있어 그녀에 대한 기억은, 겸손하고 따듯하고 프로답다는 것이다. 그녀가 지금은 재즈를 부르지 않는다 해도 아쉬운 일이 아니다. 온전히 재즈의 세계로 들어서기에는 현실적인 부딪힘이 많았을 게다. 기나긴 음악 여정 그 자체로 이미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