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아들

알프레도 볼피는 브라질 현대 미술 2세대의 가장 뛰어난 화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19세기 끝자락 이탈리아 루카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브라질 이민으로 어렸을 때부터 상파울루의 캄부치 지역에서 살았다. 그림은 스스로 익혔으나 캔버스를 살 돈이 없었고 시가 상자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1911년 즈음 상파울루 상류 사회 저택 벽에 프리즈, 패널 및 벽화를 그리게 되었고 곧 캔버스 작업도 할 수 있게 되었다. 1920년대에는 수도 상파울루의 가난한 동네 또는 도시 전망을 그리면서 사실적인 풍경화를 제작하곤 했다.

1930년대부터 볼피는 상파울루에서 활동하는 산타 헬레나 그룹(예술에 대한 헌신 외에도 단순하고 장인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그들 모임은 실제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연습에 중점을 두었고 주말에는 함께 상파울루 거리를 다니며 단순한 풍경, 축제 및 현지 일상을 그렸다)의 예술가들과 가까워지기 시작했지만, 특정 사조나 화풍에 얽매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길모퉁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카트를 끄는 팝콘 장수, 거리를 걷는 사람들과 같은 작은 마을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을 그렸다.
알프레도 볼피, 이타냐엥, 1940.
알프레도 볼피, 이타냐엥, 1940.
알프레도 볼피, 물라토 여인, 1943.
알프레도 볼피, 물라토 여인, 1943.
기하학적 추상

1944년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50년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하여 거의 6개월을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작품과 접촉했으며, 이는 그의 작품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르네상스 이전 화가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가 그의 작품에서 성취한 몇 가지 회화적 해결책을 확인시켜준다. 그는 파올로 우첼로의 작품에서 때로는 배경이 인물과 대립하고, 때로는 그 둘이 캔버스 표면에서 얽히는 환상의 게임을 발견한다.

볼피는 당시 브라질 화단을 강타한 콘크리트 운동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그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궤적은 어느덧 기하학적 추상화의 문턱에 도달했다. 재료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중세 시대 프레스코화에 쓰인 템페라를 사용했는데, 이는 안료와 달걀흰자를 혼합하여 페인트를 칠하는 기법이다. 대상으로 말하자면 주로 파사드(건물의 정면), 깃발, 축제 풍경(그는 브라질의 6월 축제인 페스타 주니나-상 조앙 축제-에서 영감을 얻었다) 등을 그렸다. 이렇게 볼피의 개성은 색의 탁월한 사용과 템페라 질감의 거친 특성으로 나타났다.

1950년대부터 작가는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하여 예술 시스템에 점점 더 많이 편입되어 국가 예술 환경과의 대화를 확대해 나갔다. 1953년 제2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최고 브라질 화가상을 수상했고, 1958년에는 구겐하임상을 수상했으며, 베니스 비엔날레(1952년, 1954년, 1962년, 1964년)에도 네 차례 참가했다. 그러면서도 벽화나 패널 작업을 꾸준히 진행했다.
알프레도 볼피, 흰 깃발이 있는 파사드, 1950년대.
알프레도 볼피, 흰 깃발이 있는 파사드, 1950년대.
브라질 대중문화의 이미지와
토착민에의 관심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그림은 점점 더 추상화되어 캔버스에서 벌이는 기하학적 모양의 놀이로 변형되었다. 볼피가 그려간 궤적은 축제와 종교 주제 및 토착 주택 양식에의 관심 사이를 오가며 형식적 종합과 함께 브라질 모더니즘과 유구한 회화 전통을 가진 유럽 예술사의 대면에 도달한다. 그의 작품은 브라질 대중문화의 참조와 인용문뿐만 아니라 노동 계급 출신으로 체득한 수작업에의 깊은 이해(예술적 경력을 시작하기 전 볼피는 벽화만 그린 것이 아니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견습 목수였고, 청소년기에는 식자공이기도 배관공이기도 했다.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되어 그는 나중까지 프레임도 직접 제작했다), 대도시 상파울루 주변부인 해안 이타냐엥, 내륙 모지다스크루지스에서의 생활 경험을 포함한다. 그에게는 또한 주디치(Judite)로 알려진 흑인 여성과 교제하고 결혼생활에 이르는, 36년 이상 지속된 관계에서 열아홉 명에 이르는 생물학적 자녀와 입양 자녀가 있는 대가족을 형성한 경험이 있었다. 주디치와의 결합은 볼피와 그의 브라질 뿌리와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아프리카계 후손들에 대한 그의 존경심은 그의 작품 중 많은 부분을 검은 피부의 캐릭터로 채우도록 했다.

기독교의 주요 이미지 중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는 마리아의 모습은 의심할 여지 없이 볼피가 가장 많이 선택한 이미지였으며, 이는 아마도 브라질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앙의 인기와 예술사에서 이러한 표현의 반복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이 장르의 가장 오래된 작품은 검은 피부의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급진적으로 묘사한 〈무제(마돈나와 아이)〉(1947)로, 이 인물들의 회화적 전통에서 특이한 작품이다.
알프레도 볼피, 무제(마돈나와 아이), 1947.
알프레도 볼피, 무제(마돈나와 아이), 1947.
깃발의 화가

볼피의 작품에서 주제와 형식 사이의 가장 큰 종합 해법은 의심할 여지 없이 깃발이었다. 그에게 깃발은 페스타 주니나에 나부끼는 깃발에 대한 브라질 대중의 상상력이면서 형식적, 미학적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대상이었다. 그의 첫 개인전을 기획했던 큐레이터 타바레스 지 아라우조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시한다. “깃발이 유래한 에피소드는 알려져 있다. 1950년대 초의 어느 날 새벽녘, 볼피는 농장이 있는 모지다스크루지스에 도착했고, 도시가 온통 6월 축제를 위해 꾸며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곧 스튜디오에서 두 줄의 깃발이 한 세트의 집들에 겹친 그림을 그렸다. 이 무렵 볼피는 이미 자연적 표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 깃발은 그가 오랫동안 개발해 온 구성 유형에 추가되어 창문, 파사드 등의 요소와 같은 기능을 한다. 볼피를 매료시킨 것은 깃발의 매우 단순한 기하학적 모양이었다.”
알프레도 볼피, 무제, 1950.
알프레도 볼피, 무제, 1950.
볼피의 작품은 대중문화와 엘리트 예술의 융합, 기하학적 언어의 창조, 장인 정신으로 손수 만들어낸 빛나는 색채가 특징이다. 볼피에게 있어서 장인적 활동은 자동화와 비인격성에 대한 저항이면서 고유의 고립성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실용적인 사람으로서, 장인으로서 매일의 고된 노동으로 그림을 연마했다. 그는 직관적인 마스터였다. 그는 어떤 “운동”으로서의 예술을 추구하기보다 자기 스튜디오에서 조용히 작업하는 것을 좋아했다. 진실은 볼피가 이러한 “주의”의 총합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그는 혁신적일 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예술가라는 드문 조건을 성취했다.
알프레도 볼피, 깃대가 있는 깃발, 1960년대.
알프레도 볼피, 깃대가 있는 깃발, 1960년대.
알프레도 볼피, 무제, 1970년대.
알프레도 볼피, 무제, 1970년대.
모더니즘 건축과의 콜라보

브라질리아의 모더니즘 건축과 예술을 통합하기 위한 오스카 니에메예르의 프로젝트에 참여한 볼피의 활약도 눈여겨볼 만하다. 볼피는 브라질리아에 파티마 성모 교회 프레스코화(1958)와 이타마라티 궁전(브라질 외교부 건물)의 <돈 보스코의 꿈> 패널(1966)을 남겼다. 프레스코화는 관리 소홀로 소실되어 현재는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알프레도 볼피, 돈 보스코의 꿈, 1966.
알프레도 볼피, 돈 보스코의 꿈, 1966.
브라질 이타마라티 궁전. 사진 가운데 유리창 안으로 <돈 보스코의 꿈>이 보인다. / 필자제공
브라질 이타마라티 궁전. 사진 가운데 유리창 안으로 <돈 보스코의 꿈>이 보인다. / 필자제공
이타마라티 프로젝트를 위해 니에메예르는 벽화가 특별히 고안된 장소에 있을 것이라고 하며 볼피에게 작품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것은 통창을 통해 밖으로 열린 복도에 걸려 거리에서 볼 수 있고 밤이면 조경의 일부를 이루는 건물 앞 수조에 반사된 빛과 조응하도록 설계되었다. 돈 보스코의 모습은 오스카 니에메예르의 외모적 특징에서 영감을 받았다. 패널의 배경은 인디고블루이며, 삼각형의 기하학적 도형과 건물 윗부분의 아치 디자인과 조화를 이룰 도형이 배치되었다. 그런데 왜 돈 보스코일까? 볼피 초청 당시 니에메예르는 예술과 문화의 중요성을 국가에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 그림은 새 수도 브라질리아에 바치는 일종의 창조 신화다. 19세기 이탈리아의 가톨릭 사제 조반니 멜키오르 보스코는 꿈을 꾸었다. 특정 지리적 좌표를 명시할 수 있는 곳에 위대한 문명이 나타나리라는.

브라질 문화사의 특수성으로 인해 그는 유럽에서라면 낭만주의 회화에서 모더니즘의 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대가 걸었을 길을 한 몸으로 모두 거치게 되었다. 그의 모든 변화는 회화와의 대화에서 무르익는 그의 성숙함에서 비롯된다. 형태 변주와 템페라의 거친 질감은 그에게 있어 느린 마모의 표시였다. 인내로 채워진 고독한 시간이 거기 담겼다.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