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너머로 쏟아진 감탄...샌프란시스코 '아트 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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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서부로 떠나는 미술관 여행샌프란시스코를 바라보는 시선은 코로나19를 거치며 많이 바뀌었다. 과거 아름다운 금문교, 도심을 가로지르는 케이블카, 유럽풍의 아름다운 집 등의 이미지 위로 거리의 노숙자와 마약 등 부정적인 이슈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날이 갈수록 악화한 샌프란시스코의 치안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방문을 주저하게 만드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설립자 간 총격전까지 벌어진
드영미술관과 리전 오브 아너
한 지붕 아래 美서부 예술 심장으로 자리잡다
美 서부 예술의 산실
'21세기 예술의 실험실' 된 SFMOMA
많은 난관에도 샌프란시스코가 빼앗기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미국 서부 예술의 심장부라는 상징성이다. 1849년 ‘골드러시’를 기점으로, 급속도로 발전한 샌프란시스코엔 많은 유럽 예술가가 몰려들었다. 도심 곳곳엔 프랑스 건축 양식의 건축물이 늘어났고 고급 레스토랑, 카페, 갤러리들이 생겨났다. 또 하나의 큰 변화는 지역 부호들이 자신의 부를 예술품을 수집하는 데 아낌없이 쏟아붓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서로를 이기기 위해 더 좋은 위치에서 더 많은 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이맘때 도심의 가장 아름다운 두 공원 안에 탄생한 드영 미술관(de Young Museum)과 리전 오브 아너(Legion of Honor)가 대표적인 예다.
20세기 초 노브힐을 중심으로 하던 보헤미안 문화, 1960~1970년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발전한 히피 문화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도시에서 예술이 어떻게 꽃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다. 1935년 설립된 미국 최초의 현대미술 전용 미술관인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은 그 중추적인 역할을 맡는다. 2000년대 들어선 실리콘밸리와의 인접성을 바탕으로 예술이 기술과 결합하기 시작하며 샌프란시스코 예술의 다양성을 확대했다.
미국 서부 예술계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이곳에서 예술의 발전은 현재진행형이다. 깎아지는 언덕, 그 위로 피어나는 짙은 안개, 안개 속을 가로지르는 케이블카 사이사이 숨어있는 미술관과 갤러리는 여전히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넓게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서쪽의 파리(Paris of the West)’라는 별명이 붙은 샌프란시스코다.
1893년 샌프란시스코의 언론 재벌 마이클 드영(1849~1925)은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는 시카고 만국 박람회를 찾았다가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당대 세계 최대 규모의 박람회였던 시카고 박람회를 찾은 방문객 수는 무려 2,700만 명이 넘었다. 그는 서부의 새로운 경제 및 문화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던 샌프란시스코에도 대규모 박람회를 개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각 준비에 나선 그는 이듬해 ‘서부의 센트럴파크’라 불리는 골든게이트 공원에서 미국 서부 최초의 대규모 국제 박람회 ‘캘리포니아 미드윈터 박람회’를 연다.
서부 예술 수도를 표방한 곳에서 열린 만큼, 미드윈터 박람회엔 미술 전시관도 따로 마련됐다. 드영의 개인 소장품을 포함해 세계 각국의 유명 미술품과 공예품이 전시됐다. 박람회가 끝난 뒤 드영은 박람회장에 전시된 예술품과 유물을 한 데 담은 미술관을 짓기로 결심한다. 드영의 노력으로 박람회가 끝난 이듬해인 1895년 샌프란시스코 최초의 공공 미술관이 탄생한다. 드영(de Young) 미술관이다.
드영 미술관은 연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샌프란시스코 대표 미술관이다. 처음엔 ‘미드페어 박람회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지만, 1921년 미술관 설립을 주도한 드영을 기리기 위해 현재와 같이 이름을 바꿨다. 설립 초기 드영 미술관의 소장품은 세계 각지의 예술품과 공예품 중심이었다.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든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지역의 각종 공예품은 드영 미술관만의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냈다.
개관한 지 불과 10여 년 만에 터진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미술관의 성격을 크게 바꿨다. 건물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1년 반 동안 박물관은 문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가 됐다. 드영은 계속해서 늘어나는 관람객을 수용하기 위해 1919년 박물관을 대대적으로 확장한다. 건물 규모만 키운 건 아니었다. 드영 미술관은 이때부터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에드가 드가의 ‘발레 리허설’ 등 유명한 서구 명화를 컬렉션에 대거 포함했다. 드영 미술관을 찾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앤디 워홀, 키스 해링, 알렉산더 맥퀸 등 다양한 현대 미술 및 패션 작가들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모두를 위한 미술관’을 표방했던 드영의 철학 때문이었다.
리전 오브 아너와의 대립
드영은 불과 16세의 나이에 자기 형과 함께 지역 언론사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을 창립했다. 두 젊은 청년이 세운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지역 정·재계 유명 인사들의 치부도 거리낌 없이 보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적인 보도는 많은 사람의 원한을 샀다. 형인 찰스 드영은 1880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아이작 칼드웰 목사의 과거 스캔들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뒤 이에 앙심을 품고 사무실을 찾아온 칼드웰 목사의 아들이 쏜 총격에 사망한다.
총격을 피하지 못한 건 마이클 드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탕 사업으로 큰돈을 번 애돌프 스프래클스는 1884년 자신의 개인사와 사업의 부정적인 면을 보도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기사에 격분해 드영에게 다섯 발의 총격을 가한다. 드영은 총격에 중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뒤, 두 사람 사이의 악연은 뜻밖에도 두 미술관 사이에서 다시 피어올랐다. 애돌프 스프래클스의 아내 알마 스프래클스는 남편의 재력을 바탕으로 1924년 미술관 ‘리전 오브 아너(Legion of Honor)’를 설립했다. 스프래클스는 처음부터 남편의 숙적이나 다름없던 드영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견제하는 데 모든 걸 집중했다.
그중에서도 리전 오브 아너가 자랑하는 작품들은 방대한 프랑스의 고전 회화와 조각품이다. 스프래클스 부부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를 지원하는 전쟁 구호 활동을 활발히 펼칠 정도로 프랑스를 좋아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을 받았다. 미술관의 이름도 훈장 이름의 영문 버전인 ‘리전 오브 아너’를 택했다. 새 미술관을 미국과의 우호 관계의 상징으로 만들고 싶던 프랑스 정부도 미술관 설립을 적극 지지했다. 아직도 리전 오브 아너에 들어가면 로댕의 청동 버전 ‘입맞춤‘과 ’세 개의 그림자‘ 뒤편으로 프랑스 국기가 꽂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결국은 한 지붕 아래가 된 두 미술관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과 로댕 박물관에 뒤지지 않는 수준 높은 작품 컬렉션을 가진 리전 오브 아너는 개관하자마자 샌프란시스코의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 프랑스 고전 건축 양식의 건물에 들어서 중정(中庭)에 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바라보면 흡사 유럽에 온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렘브란트의 ‘아폴로의 승리’, 모네의 ‘수련’ 등 당대를 대표하는 걸작 외에도 이곳의 백미를 장식하는 건 미술관 앞으로 펼쳐진 절경이다. 깎아지는 듯한 절벽 위에 있는 미술관을 나서면 눈앞으로 링컨 공원의 초록 숲과 푸른 태평양, 붉은 금문교가 한데 어우러진다.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은 ‘미래의 예술’을 보기 위해 방문하는 곳이다.”
‘석유왕’ 존 D 록펠러의 아들 데이비드 록펠러는 SFMOMA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미국의 예술 및 문화 프로젝트 후원에 누구보다 적극적이던 록펠러재단을 이끌던 그는 SFMOMA가 미국 서부를 넘어 전 세계 현대미술의 중요한 거점이 될 것이라고 봤다.
특히 그는 사진, 미디어아트, 설치 미술 등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박물관의 운영 철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미국 미술계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미국 현대 미술의 원형을 제시한다면, SFMOMA는 서부 특유의 실험 정신과 기술과의 결합을 바탕으로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제시하는 곳이라 평가한다.
SFMOMA는 10층 높이, 총 4만 5,000㎡ 면적의 미국 최대 규모의 현대미술관이다. 하지만 설립할 때부터 이와 같은 규모였던 건 아니다. SFMOMA는 1935년 샌프란시스코 재향군인회 건물 4층의 작은 임대 공간으로 출발했다. 설립 당시 작품 수는 불과 200여 점에 불과했다. 미술 애호가였던 그레이스 맥켄 몰리 감독은 미국 서부에도 현대미술에 특화된 미술관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SFMOMA의 설립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는 당대 모더니즘 예술의 중심지로 거듭난 뉴욕에 못지않은 현대미술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작은 규모로 시작했지만, SFMOMA는 금세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했다. 배경엔 지역 예술계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일대 화가와 작가 후원의 ‘큰손’이었던 앨버트 벤더는 생전 1,100점 이상의 작품을 기증하며 SFMOMA가 세계적인 작품 컬렉션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직도 SFMOMA에선 방대한 아담스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1951년부터는 격주로 ‘당신의 삶 속 예술(Art in Your Life)’이라는 이름의 TV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설립자 몰리는 “우리는 미술과 예술가들을 위해 TV를 활용할 것”이라며 뉴미디어를 예술의 한 축으로 적극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테크와 아트 결합 선구자로
이런 움직임은 SFMOMA의 영원한 라이벌 뉴욕 MoMA와의 결정적인 차이다. 1929년 개관한 뉴욕 MoMA는 개관 이후 피카소, 마티스, 달리, 몬드리안 등 서구 모더니즘 거장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컬렉션을 구축하며 ‘현대 미술의 정전(正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반면 SFMOMA는 신기술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적극 받아들였다.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가 바로 백남준이다.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인 백남준은 살아생전 SFMOMA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었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은 지금도 미술관을 찾는 많은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SFMOMA는 관람객과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우선으로 하는 전시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다른 박물관들이 유명하거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을 관람객들에게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미술관’에 그친다면, SFMOMA는 관객이 직접 체험하고 참여할 수 있는 전시를 적극적으로 기획한다. 현재 진행 중인 덴마크 설치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의 ‘원웨이 컬러 터널’ 전시나 미국 조경 건축가 바바라 스타우퍼의 ‘줄무늬의 조각들(Strips of Stripes)’ 전시도 이 같은 SFMOMA의 철학이 묻어나는 전시다. 이들은 빛, 물, 온도 등 작품의 재질을 활용해 관람객의 경험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SFMOMA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공간이다. SFMOMA는 2016년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통해 지금과 같은 규모의 세계 최대 현대미술관으로 거듭났다. 단순히 면적만 넓어진 건 아니다. 노르웨이 건축회사 스노헤타는 미술관 건물 자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구현되게끔 하는 데 집중했다. 샌프란시스코만(灣)의 파도와 도시를 뒤덮는 안개에서 영감을 받은 물결 형태의 흰 파사드는 1995년에 지어진 기존 건물과 우뚝 솟아있는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마천루들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3층 테라스로 올라가면 캘리포니아 지역 토종 식물들이 벽을 뒤덮은 수직 정원 ‘리빙 월(living wall)’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관람객들이 직접 풀을 만지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건 물론 건물의 공기 질 개선과 단열 역할까지 한다.
美 동양 문화 허브 된 아시안 아트 뮤지엄
미국 내 아시아계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인 샌프란시스코엔 특별한 미술관이 하나 있다. 바로 아시안 아트 뮤지엄이다. SFMOMA가 서부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곳이라면, 아시안 아트 뮤지엄은 미국 내 아시아 예술의 허브다. 미국에서 가장 방대한 아시아 미술 컬렉션을 갖고 있다. 한·중·일·인도 등 아시아 각국에서 수집한 도자기와 서예 작품 등 총 1만 8,000여 점이 넘는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송영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