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건축은 안에서 밖으로 움직인다…DDP 공간구조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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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정민의 열린 공간과 사유들우리에게 한 공간에 관해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그곳에서 경험한 것을 말하게 된다. 그 공간에서 보고 들은 것, 번잡함은 소란스러운 정도로 표현되고, 그 안에서 본 풍경은 그 공간을 표현하는 수식 그 자체가 된다 (ex. 뷰맛집). 조금 예민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만진 것이나 디딘 것에 대해 말할지도 모른다. '그 커다란 문이 말이야. 살짝 밀었을 뿐인데 쑥 하고 미끄러지더라고’, '그 검은 돌 말이야. 제주도에서나 보던 그거. 그게 입구에 깔려있었는데 꽤 괜찮더라.’ 만약 그곳이 어떤 음식이나 음료를 제공하는 곳이라면 거기에서 맛본 것까지도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이 된다. 즉 오감으로 경험한 모든 것이 그 공간에 대한 총체적 이미지가 된다.
공간과 건축, 그 인식의 차이
'환유의 풍경' DDP의 형태
하지만 여기서 이 공간이라는 단어를 건축으로 바꾼다면 우리의 뇌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그 이미지는 한참을 올라가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기 시작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영화의 버드아이뷰가 우리를 세뇌한 것일까? 아니면 드론이 그 시점을 보급화한 것일까? 혹은 우리가 건축을 소유물로서 바라보기 위함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공간이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의미와 건축이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의미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공간은 경험하는 곳이지만 건축은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축소화된 하나의 이미지다. 그리고 이 이미지가 제시하는 것은 오로지 시각뿐이다.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작용하고 경험을 제공하는 것은 내부 공간이지만 특정한 건축을 상징하는 것은 그것의 외양이다.
하나의 건축에 그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 또한 내부 공간이 아닌 그 건축물의 외양이다. 하지만 그런 상징물로서의 공간은 실제로 방문했을 때 특수한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다. 안이 아닌 밖에서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 더 가치가 있다. 중세 후기 현대 건축가의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어떤 후원자의 지시 사항은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프랑스 전체에 본보기가 될 만한 탑을 세우시오.” (이 푸 투안 『공간과 장소』(2020)) 한 도시 전체의 본보기가 될 만한 건축을 만들려면 우선 그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아야 할 것이다. 책상 위에 펼쳐놓은 종이 위에 그 도시를 투영해 내고 그 가운데에 본보기가 될 만한 아름다운 형태감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그 출발점이었을 테다.
'미래적인’, 'SF 영화 같은’이라는 표현은 이 DDP의 핵심을 형태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하지만 이곳을 거닐며 서서히 바라보면 또 다른 핵심이 드러난다. 그것은 이 꿈틀거리는 거대한 덩어리를 관통하고 있는 두 개의 구멍이다. 밖으로 돌출된 부분이 아니라 그 안으로 뚫린 부분,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라 이 보이지 않는 공간의 형태, 양방향으로 뻗어있는 축음기 같은 모양의 이 보이지 않는 덩어리를 이곳의 핵심으로 바라본다면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된다. 출근하는 것이든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든 간에 이곳을 통과해 많은 사람들이 이동한다. 어찌 보면 그 미래적인 형태는 이 두 개의 축이 관통하며 뚫어 놓은 커다란 반죽 덩어리가 그 모양 그대로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두 개의 구멍이 없었다면 이처럼 많은 움직임을 품어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덩어리가 있기에 이 공간은 수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품었다가 어느 방향으로든 다시 놓아준다.
상징적인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장소가 지닌 텍스트를 읽어내야 한다. 주로 그 텍스트는 과거의 것이다. 내 생각에 자하 하디드가 이곳에서 읽어낸 것은 과거의 텍스트뿐이 아니라 미래의 텍스트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테마가 '환유의 풍경(Metonymic Landscape)’이었던 건 아닐까? 그 장소에서 일어난 과거의 기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수많은 움직임을 기억하며 미래를 향한 움직임마저 품어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상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연속성이라는 역설적인 공간의 언어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이 공간의 여러 번 돌고 돌며 점점 강해졌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 공간의 자유로운 그 형태는 분명 밖(시각적 아름다움)에서 안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 안(움직임, 장소가 지닌 미래의 텍스트)에서 밖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칼럼 제목에 열린 공간이라는 단어를 넣고 나서 잠시 후회했던 순간이 있다. 앞서 말했듯 연속성, 개방성과 같은 성질은 공간의 본질이 아닌 역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공간만을 찾아서 소개하는 것은 스스로 제한을 걸어버린 것이란 생각이었다.
몇 시간을 이 공간에 머무르며 이렇게 거의 모든 방향으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공간이 또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에 있는 많은 공간이 열려 있는 듯 말하지만 막상 방문해 보면 단절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단절은 보행로를 가로막는 주차 공간으로의 진입도로처럼 물리적 단절로도 접근의 제한과 같은 의미적 단절로도 드러났었다.
DDP는 어쩌면 외부에서 그 웅장함을 즐기거나 건축주와 건축가가 함께 헬기에 올라 내려다보기에 훌륭한 형태감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안에서 밖으로 향한 움직임의 발현으로 본다면, 그중에서 가장 깊숙한 안쪽에서 출발하여 입체적인 형태로 발현된 것으로 본다면 그 어떤 랜드마크들보다도 더 강렬한 감정을 선사하는 면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곳은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진정으로 열린 공간이다.
박정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