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 하종현 개인전
돈 없어 캔버스 대신 마대 구입
물감칠 안되자 뒷면으로 밀어 넣어
단색화 대표작 '접합' 연작 탄생
구순 나이에도 끊임없이 변화
5월 11일까지 국제갤러리
하종현 작가. 국제갤러리 제공관심 없는 사람이 보면 파블로 피카소의 입체파 작품은 괴상한 그림에 불과하고,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의 작품은 그저 골동품 TV 더미일 뿐이다. 현대미술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고 즐기려면 작품에 담긴 뜻과 작가의 스토리를 공부한 뒤 ‘직접’ 봐야 한다. 하지만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작가의 작품은 너무 비싸서 작품 세계 전반을 조명하는 전시를 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하종현 화백(90·사진)의 개인전 ‘하종현’은 한국 현대미술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귀한 기회다.
때로 예술은 결핍에서 태어난다. 종이를 살 돈이 없었던 이중섭이 담배를 싸는 종이에 뾰족한 도구로 그림을 그려 은지화(銀紙畵)를 만든 것처럼 하종현의 ‘접합’ 연작도 가난에서 탄생했다. 시작은 1974년이었다. 캔버스를 살 돈이 없던 그는 시장에서 파는 마대에 그림을 그리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올 사이의 구멍이 너무 커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차라리 뒤에서부터 물감을 칠해 앞으로 밀어붙여 보자.’
'접합 24-52'.그저 궁여지책은 아니었다. 하종현이 그간 천착해온 화두는 ‘입체와 평면’. 마대 뒤에서 물감을 밀어낸 결과물은 ‘평면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대라는 물질과 물감을 결합한 하나의 입체 작품이기도 했다. 평면과 입체의 만남, 마대라는 재료와 유화물감의 만남, 배채법(그림의 뒷면에서 채색해 그림 앞면으로 배어 나온 발색 효과를 이용한 전통 화법)이라는 한국의 전통 수묵 초상화 기법과 글로벌 현대미술의 만남…. ‘맞닿아 붙다’라는 뜻의 접합이라는 이름에는 이런 중의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이후 하종현의 접합 연작은 국내외에서 널리 인정받으며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지금 접합 연작 가격은 점당 수억원을 호가한다. ‘그림은 캔버스 앞면에 그리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한 독창성, 단색화 특유의 절제된 아름다움, 작품에 담긴 유려한 철학이 인기 요인이다.
그는 접합 연작의 틀 안에서 끊임없이 작풍을 바꿔왔다. 2008년 들어 발표한 ‘이후접합’이 단적인 예다. 현란한 색(色)의 난무가 일상화된 시대를 맞아 색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나무토막을 활용해 입체성을 더욱 강조한 연작이다. 그간 기왓장이나 백자를 연상시키는 한국적 색상을 주로 사용해온 것과 대조적이다.
'접합 23-74'.
하종현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전시장 전경. 국제갤러리 제공국제갤러리 전시는 이처럼 다양한 색채를 쓴 접합 연작이 주를 이룬다. 캔버스 뒷면에서 만들어진 작가의 붓 터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밝은색들이 섞여 나타나는 그러데이션이 현대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형성한다.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신작 ‘접합 23-74’이 대표적이다. 기둥 형상의 수직적인 붓 터치가 중심이던 이전 작품과 달리, 자유분방하면서 계산된 듯한 미묘한 사선 형태의 붓 터치로 화면을 가득 채운 작품이다. 전시는 오는 5월 11일까지.
성수영 기자
※하종현의 작품 세계와 국제갤러리 전시 리뷰 전문은 ‘아르떼’ 매거진 11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