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불안은 사라졌나요"...책장 너머 도착한 그녀의 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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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일제강점기와 군사정권 시절 배경
서점에서 펼쳐지는 타임리프 작품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는 판타지로 변한 이러한 기억을 현재로 소환하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낭만 가득한 사랑 이야기로 보긴 어렵다. 무대 위 두 남녀의 동선은 계속 엇갈리고,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도 찾아볼 수 없다. 연출상 두 배우가 마주보긴 하지만, 실제로 이들 사이엔 40년의 세월이 흐른다.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서점인 ‘아시타 서림’ 주인 양희는 1940년을, 기자가 되고 싶은 대학생 해준은 1980년을 살고 있다.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 사람은 아시타 서림의 책 한 권을 통해 연결된다. 어느 날, 양희는 자신이 집필하고 있는 소설의 다음 문장을 누군가 대신 쓴 흔적을 발견한다. 바로 40년 뒤를 살고 있는 해준이다. 이렇게 양희 혼자 써 내려가던 글은 긴 시간을 거스르며 둘만의 교환일기이자 대화가 된다. 양희가 일제강점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해준은 미래를 아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일본인 총독 암살 계획에 관여한다.
‘자유’를 향한 염원은 시간을 초월해 두 사람을 잇는다. 양희는 일본에 빼앗긴 조선의 자유를 되찾기를, 해준은 군사정권에 짓밟힌 시민들의 자유가 회복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양희는 해준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거리의 불안은 사라졌습니까?”
작품은 2025년 현재의 관객들에게도 진한 울림을 준다. “나의 오늘은 너의 내일이 된다”며 거리로 나서는 양희의 모습에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목숨을 바치던 이전 세대의 희생과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마냥 무겁기만 한 작품은 아니다. 서로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장면 등에선 저항 없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시간을 건너뛰는 설정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영화 ‘동감’, ‘시간이탈자’ 등 수많은 콘텐츠에서 타임리프 장치를 활용해왔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시간이동을 표현할 때 펼쳐지는 마법 같은 조명 효과 덕분에 진부하다는 인상이 충분히 보완된다. 무대를 꽉 채운 서점의 따스한 미감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데스노트’ 등에 참여한 오필영 무대 디자이너가 설립한 ‘이모셔널씨어터’의 작품다운 완성도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만 웅장한 대극장 뮤지컬에 익숙한 관객은 서정적 멜로디가 중심인 노래가 다소 잔잔하게 느껴질 수 있다.
창작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는 초연 작품이란 점에서 선뜻 관람을 결정하기 망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시대극 애호가이거나 적당한 무게감의 뮤지컬을 선호하는 관객이라면 더없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공연장에 가는 길부터 감상에 젖을 수 있는 것도 대학로 뮤지컬의 매력. 1980년대 민주화운동 아지트였던 대학로 학림다방을 지나 혜화동로터리를 70년 넘게 지키고 있는 동양서림을 거치면 만날 수 있는 et theatre 1(이티 시어터 원)에서 오는 6월 21일까지 공연한다.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