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한 놈" 폭언에 스스로 눈 찔렀다…'천재'의 비극적 최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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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반 고흐'
기인 화가, 최북
조선 영조 시기, 어느 ‘높으신 분’의 집. 조정에서 힘깨나 쓴다는 대감 나리의 고함이 방 안을 쩌렁쩌렁 올렸습니다. 그 앞에 앉은 화가, 최북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감이 화난 이유는, 자신이 그리라고 시킨 그림을 제때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 사실 대감이 이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최북에게 정식으로 그림을 의뢰한 적이 없었거든요. 뭐 하나 주는 것도 없이, 마치 하인에게 명령하듯이 “언제까지 그림이 필요하니 하나 가져오라”고 툭 말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질책과 폭언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에잉, 쯧쯧... 천한 재주 하나 가지고 있다고 눈에 뵈는 게 없구먼.” 최북의 손은 어느새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미천한 환쟁이(화가의 멸칭) 따위가 그럼 그렇지. 됐다. 그림이나 냉큼 그려오너라. 썩 꺼지거라.” 대감이 말을 마치자 최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인간으로서, 화가로서의 자존심을 짓밟힌 그의 눈은 분노로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최북은 순식간에 옆에 있는 날카로운 물건을 잡아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한쪽 눈을 힘껏 찔러버렸습니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눈에서 피가 솟구쳤습니다. 그리고 최북은 소리쳤습니다. “세상이 나를 저버리느니, 차라리 내 눈이 나를 저버리게 하겠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 대감은 기겁해 아예 방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그는 왜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요. 조선 최고의 기인 화가이자 ‘조선의 반 고흐’로도 불리는, 최북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중인 화가, 최메추라기
조선 숙종 말기인 1710년대 초반, 최북은 무주(현재 전라북도)의 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는 시(詩)와 글,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 사회에서 그의 앞날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중인이라는 신분 때문입니다.당시 중인이란 신분은 양반과 상민 사이에 있는 일종의 중간 계층. 상민과 달리 ‘족보 있는 집안’이지만 고위 관료로의 승진이 막혀 있는 애매한 위치였습니다. 그래서 중인들은 외교관이나 국가에 고용된 의사, 연구원, 화가 등의 일을 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양반 사회에서는 잡직(천하고 잡스러운 직업)이라 불리며 무시당하는 직업들이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최북의 재능을 보고 이렇게 아쉬워하곤 했습니다. “아깝다, 글을 잘 쓰니 양반 집안에 태어났으면 큰 벼슬을 했을 텐데….”
그래서 최북은 자신의 호를 호생관(毫生館)이라 지었습니다. 붓(毫) 하나로 먹고산다(生)는 뜻입니다. 20대 후반에서 30대에 이르는 동안 그는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려 팔기 시작합니다. 뛰어난 그림 실력 덕분에 그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졌습니다. 한양(서울), 평양, 동래(부산)…. 전국에서 그림을 그려달라며 최북을 불렀고, 그가 머물며 그림을 그리는 숙소 근처는 늘 구경꾼들과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최북은 교양 넘치는 화가였습니다. 그는 남는 시간에 짬짬이 책을 읽었고, 글도 썼습니다. 덕분에 그는 많은 유명한 문인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이 대표적입니다. 이익은 최북의 그림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최북은 붓으로 산을 옮길 수 있는 화가다. 붓질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분석해 그리는 덕분에 진실한 모습을 잘 묘사한다.” 최북이 일본에 갈 때도 이익은 잘 다녀오라며 시까지 한 수 지어줬습니다.
거기 쟤
30대 후반이던 1748년, 최북은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 일행에 수행원으로 포함돼 에도(도쿄)에 다녀오게 됩니다. 일본의 고위 관료들에게 그림을 그려주며 외교 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게 첫 번째 목적. 그 과정에서 보게 되는 여러 문물과 풍습을 그림으로 그려오는 게 두 번째 목적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일본 사회의 사정을 구석구석 사진으로 찍어오는 사진사 역할이었지요. 이런 중요한 역할을 맡길 정도로 최북의 이름은 높았습니다.최북은 그렇게 6개월간 현지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그가 머무는 곳 앞에는 늘 일본인들이 금은보화를 들고 길게 줄을 서 있었습니다. 최북의 뛰어난 그림을 한 점이라도 받아 가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보람찬 나날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그에게 귀중한 물건을 바치며 공손하게 그림을 그려달라 부탁했습니다. 일본에서 화가는 꽤 괜찮은 직업이었거든요. 궁정 화가, 혹은 귀족의 후원을 받는 화가는 명예와 경제적인 안정을 누렸습니다. 서민 출신 화가에 대한 대접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인기만 있으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었고, 간혹 신분 상승의 기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왕족과 고위 관료들은 그를 하인 대하듯 했습니다. 그림을 그려 오라고 고압적으로 지시하면서도 정당한 대가는 지불하지 않았고, 되려 최북이 중인 출신의 ‘천한 환쟁이’에 불과하다며 그를 깎아내렸습니다. 기록에는 최북의 분노가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최북은 끝내 염증을 냈다. 누가 ‘여기에 그림을 그려달라’며 흰 비단을 가지고 와도 받아서 구석에 팽개쳐 두기 일쑤였다.” 최북의 호 중 하나인 거기재(居基齋)가, 양반들이 자신을 ‘거기 쟤’라 낮춰 불렀기 때문에 자조의 의미로 붙였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입니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없는 중인이라는 신분. ‘그림을 그리는 건 잡스럽고 천한 일’이라는 사회적 편견. 그림을 잘 그리고, 그 덕분에 명성을 얻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착취와 무시에 노출되는 아이러니. 그렇다고 해서 생계 수단인 그림을 그만둘 수도 없는 상황. 최북은 깊은 절망을 느꼈습니다. 그가 기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좌절감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북이 스스로 눈을 찌른 일화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최북에게 ‘눈’, 즉 대상을 보고 그리는 능력은 그에게 명성을 안겨줬습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사람에게 환쟁이라며 무시당하는 빌미를 준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최북은 화가의 생명인 눈을 스스로 찔렀습니다. 어떤 이들은 최북의 이런 행동을 자기 귀를 자른 반 고흐에게 비유하며 ‘조선의 반 고흐’라고 부르곤 합니다. 하지만 최북의 자해는, 고흐의 그것보다 더욱 처절했습니다.
칠칠치 못한 화가
최북은 붓과 종이를 싸 들고 훌쩍 길을 떠났습니다.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명승지를 구경하고, 그 풍경을 그림으로 남기고, 그 지역의 문인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40대 무렵 그는 단양의 경치를 담은 ‘단구승유도’, 금강산을 담은 ‘금강산전도’ 등을 남깁니다. 그의 명성은 계속 높아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에게 극찬을 보냈습니다. “신필(神筆·신의 경지에 오른 붓 솜씨)이다.” “(겸재 정선의 제자이자 조선 회화의 대가였던) 심사정과 동급이다.”하지만 최북은 양반 출신인 겸재 정선이나 심사정과 달리 어디까지나 중인 신분이었고, 자주 무시당했습니다. 그렇게 쌓인 울분은 술과 만나 기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여러 이야기 중 대표적인 일화를 세 가지만 소개합니다.
반면 그림값이 너무 많으면 최북은 상대방을 비웃었습니다. “이따위 그림에 그렇게 후한 값을 치르다니, 참으로 안목이 없는 바보로구나!” 이런 행동은 그림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화풀이였습니다.
하지만 이를 들은 최북은 발끈했습니다. “이놈, 내가 언제 직장 벼슬을 한 적이 있다고 그러느냐. 차라리 정승이라 불러라.” 하지만 하인은 최북의 말이 농담인 줄 알고 웃으며 되물었습니다. “언제 정승이 되셨습니까?” 그러자 최북은 소리쳤습니다. “그러면 내가 언제 직장이었더냐. 헛된 벼슬을 붙일 바엔 정승이라 하는 게 낫지!” 그리고 최북은 주인을 만나지도 않은 채 뒤돌아 떠나버렸습니다. 하인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입니다만, 그만큼 신분제와 사회 구조에 대한 최북의 분노가 컸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다행히도 옷이 나뭇가지에 걸린 덕분에 최북은 추락사를 면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겨우겨우 끌어올려 바위 위에 눕혀두자, 한참을 헐떡이던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광기 어린 감정의 폭발. 그건 최북의 삶과 예술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이 미웠습니다. 화가를 인정하기는커녕 멸시하는 사회가,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제도가 미웠습니다. 중인으로 태어난 자신이, 무시를 받으면서도 그림을 그려 먹고살 수밖에 없는 자신이 미웠습니다. 그래서 최북은 자신에게 ‘칠칠(七七)’이란 호를 붙였습니다. 자신의 이름인 북(北)을 둘로 쪼개면 칠(七) 두 개가 나오는데, 여기에 ‘칠칠치 못하게 그림이나 그린다’는 뜻을 담은 겁니다.
최북은 어느 샌가부터 자신의 흥취와 고통, 예술혼을 뒤섞어 내지르듯 붓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이런 거칠고 자유분방한 그림을, 최북이 전에 그리던 정교하고 단정한 그림보다 더욱 사랑했습니다.
그대는 봤는가, 최북이 눈 속에서 죽은 것을
최북은 생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기상천외한 행동으로 ‘갑질’을 일삼는 권세가나 세도가들을 놀라게 하고 무안하게 만들었지만, 친구들에게는 재치가 넘치면서도 인정이 있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이광사, 신광수, 강세황, 남공철 등 많은 고위 관료들이 그와 깊이 어울리며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세월은 계속 흘렀습니다. 영조는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즉위했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고, 어느덧 최북도 노인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그는 벼슬도, 모아둔 재산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며 그림만 그렸습니다.
최북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칠칠(七七)”이라는 자신의 호에 맞춰 49세에 죽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7X7=49)도 있지만, 말년에 그린 작품들이 뒤늦게 발견되면서 그가 70대 중후반에 세상을 떠났다는 게 사실로 여겨집니다. 최후에 대한 이야기도 제각각입니다. “서울의 여관에서 쓸쓸히 죽었으나 어느 해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겨울날 술에 취해 성벽 아래 잠들었는데, 폭설이 내려 얼어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친구였던 시인 신광하(1729~1796)는 훗날 최북의 죽음을 애도하며 ‘최북가’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최북이 눈 속에서 죽은 것을/.../체구는 작달막하고 눈은 외눈이었다네만/술 석잔 들어가면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다네/.../그 옛날 대가라고 하던 안견, 이징의 작품들을 모두 쓸어버리고/술에 취해 미친 듯 붓을 휘두르면/고당 대낮에 강호가 나타나네/열흘을 굶다가 그림 한 폭 팔고는/크게 취해 한밤 중 돌아오던 길에/성곽 모퉁이에 쓰러졌다네/.../오호라 최북은 몸은 비록 얼어 죽었어도/그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
그 말대로 최북의 이름은 오랫동안 이 땅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자연과 예술에 미쳤고, 사회의 모순과 신분의 한계 속에서도 자기 눈을 버려 가며 자존을 지킨 진정한 자유인. “빈 산에 사람은 없어도 물은 흐르고 꽃은 피듯”(공산무인도), 그의 영혼은 아직도 거친 붓 자국 속에서 숨 쉬고 있습니다.
다만 현대에 들어서는 최북이 벌인 여러 기행은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최북의 기이한 행동에 대한 기록 대부분이 그가 죽은 뒤에 쓰였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연구들의 주장에 따르면 최북의 드라마틱한 삶은 후대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화에 가깝습니다. 이런 ‘작업’을 한건 19세기 조선의 중인들. 세상이 바뀌는데도 변화를 거부하는 조선 사회와 신분제도에 절망하던 이들이, 최북을 재발굴해 ‘신분 차별 때문에 능력을 다 펼치지 못한 천재’의 상징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최북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그의 이야기에는 조선 사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기술과 물질적인 것들을 천하게 여기고, 관념과 정치 투쟁에만 몰두하며, 갖고 태어난 것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사회 구조가 낳은 결과물은 비극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런 연구들의 주장에 따르면 최북의 드라마틱한 삶은 후대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화에 가깝습니다. 이런 ‘작업’을 한건 19세기 조선의 중인들. 세상이 바뀌는데도 변화를 거부하는 조선 사회와 신분제도에 절망하던 이들이, 최북을 재발굴해 ‘신분 차별 때문에 능력을 다 펼치지 못한 천재’의 상징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최북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그의 이야기에는 조선 사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기술과 물질적인 것들을 천하게 여기고, 관념과 정치 투쟁에만 몰두하며, 갖고 태어난 것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사회 구조가 낳은 결과물은 비극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최북, 기인 화가의 탄생>(유재빈 홍익대 교수 논문), <호생관 최북>(국립전주박물관), <화인열전>(유홍준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평가,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7만여명의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앞서 다뤘던 화가들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그림들은 두 권의 책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과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으로 곁에 두고 즐길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