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을 건너 어른이 된 치히로…공간이 바꾼 정체성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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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최영균의 공간탐구 of NETFLIX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공간을 넘나들며 변화하는 ‘치히로’의 정체성을 그려낸 애니메이션이다. 작품의 주인공 치히로는 비일상적 세상에 수동적으로 내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관문을 하나씩 통과하며 새로운 질서 속으로 나아가고 또 성장한다. 공간의 변화를 중심으로, 치히로의 여정에 숨은 건축적 장치들을 살펴보자.
터널의 저편, 새로운 질서가 지배하는 공간
영화
어린아이였던 ‘치히로’와
시련 속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센’
“치히로, 좋은 이름이야
네 이름을 소중히 해야 한다“
일상(현실 세계) – 터널 – 비일상(신들의 세계)
시골로 이사하게 된 치히로. 살던 곳을 떠나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다. 작별 인사로 받은 꽃다발이 금세 시들어버려 치히로는 더욱 풀이 죽어있다. 그런 치히로의 마음도 몰라주는 아빠는 신나게 차를 내달린다. 아니나 다를까, 아빠가 운전하는 차는 숲속에서 길을 잃고 터널 앞에 멈춘다. 치히로의 가족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터널로 홀린 듯이 들어간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자,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테마파크가 펼쳐진다. 음식 냄새를 따라 도착한 식당엔 갓 만든 음식이 가득하지만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어두워진 거리엔 조명이 켜지고, 검은 유령들이 나타난다. 음식을 탐닉하던 부모님은 어느새 돼지로 변해버렸다. 놀란 치히로는 일상으로 돌아가려 이리저리 뛰어다니지만 돌아갈 길이 없어 좌절하고 만다.
치히로는 현실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붉은 다리를 건너 온천탕으로 향한다. 그러나 인간인 치히로는 신들의 세계에 속할 수 없었다. 새로운 세상에 녹아들기 위해선, 일을 하며 이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했다. 치히로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온천탕의 주인 ‘유바바’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엘리베이터를 세 번이나 갈아타며 층층이 이어진 온천탕을 올라, 마침내 유바바가 머무는 방에 도착한다. 유바바의 방은 화려하게 치장된 거대한 공간이다. 높은 천장과 책장, 하늘을 날아다니는 서류들은 유바바의 허영과 권위를 드러낸다.
온천탕으로 향하는 붉은 다리는 경계를 잇는 동시에 경계를 강조하는 장치다. 치히로가 이 다리를 건너는 순간, 현실 세계를 뒤로하고 신들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
온천탕 - 기차 - 제니바의 집
센은 여러 주변인의 도움으로 온천탕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면서도 센은 자신이 돌아가야 할 현실 세상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본래 이름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센은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님을 되찾기 위해 자신이 정착했던 온천탕을 떠나 기차를 탄다. 유바바의 언니인 ‘제니바’를 만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현실 세계에선 터널에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치히로는,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센으로 성장했다.
제니바의 집은 유바바의 집과 대비된다. 유바바의 집이 화려하고 위압적인 대공간이었다면, 제니바의 집은 아늑하고 소박한 공간이다. 두 자매의 성격과 똑 닮은 집이다. 진심을 담은 사과로 제니바의 마음을 얻은 센. 제니바는 센을 따뜻하게 응원하며 용기를 북돋운다. 덕분에 센은 유바바에게서 부모님과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터널을 통해 현실 세계로 복귀한다. 마치 꿈꾼 것 같은 며칠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치히로의 내면은 분명히 그 이전과는 다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는 터널, 붉은 다리, 온천탕, 기차 등 다양한 공간이 등장한다. 이 공간들은 치히로가 성장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하는 장치다. 치히로가 공간을 하나씩 통과하며 성장하듯, 우리도 새로운 공간에 놓이며 성장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한 공간들이 우리를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지금의 나를 형성한 것이다.
건축이란,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의 행동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는 공간의 변화를 통해 정체성의 변화를 체감한다. 교실에 들어가면 학생이 되고, 무대에 서면 배우가 된다. 때문에 건축은 물리적 구조를 짓는 일이 아니라, 삶을 설계하는 비물질적인 일에 가깝다.
최영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