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수 없기에 더욱 사랑했던... 쥘 마스네의 '베르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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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박마린의 유럽 클래식 산책젊은 시절, 특히 사춘기에는 외국 문학에 심취하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무렵 의례 접하는 고전 가운데 하나가 바로 괴테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이다. 철학과 문학의 나라 독일이 낳은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그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1774년에 출간 이후 유럽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킨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며, 전 세계 젊은이들의 필독서로 오늘날까지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025년 3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
쥘 마스네(Jules Massenet)의 오페라
샤를로테의 심리에 포커스한 재해석
자연을 사랑하는 젊고 감수성 예민한 예술가 베르테르. 그는 순수하고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도시를 떠나 전원 마을로 이주하며 샤를로테(Charlotte)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샤를로테는 아버지를 도와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여섯 명의 동생을 돌보는 책임감 있고 따뜻한 여성이다. 그러나 샤를로테에게는 이미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었고, 그들은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베르테르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노력하지만, 그의 샤를로테에 대한 감정은 점점 깊어지고, 샤를로테 역시 베르테르에 대한 사랑과 알베르트와의 결혼에 대한 의무감 사이에서 방황하며 괴로워한다.
점점 정신적 고통에 빠지는 베르테르는 결국 샤를로테와 알베르트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가 아무 의미 없음을 깨닫고, 크리스마스이브 날 알베르트의 권총을 빌려 자살, 생을 마감한다.
쥘 마스네의 오페라 <베르테르>
쥘 마스네(Jules Massenet, 1842–1912)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로, 샤를 구노(Charles Gounod, 1818–1893)의 계승자로 불린다. 그는 파리 음악원에서 수학했고 1863년 음악계 최고의 권위인 로마 상을 수상하며 일찍이 주목받았다. 그의 음악은 아름다운 선율,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 그리고 인물 심리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극적 구성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마농(Manon)>, <베르테르(Werther)>, <타이스(Thaïs)>가 있다.
<베르테르>는 마스네의 성숙기 즉, 작곡가가 50세를 앞두고 쓴 작품이다. 괴테의 소설이 발표된 지 백 년이 지나서 마스네를 통해 오페라로 재탄생한 <베르테르>는 그의 이전 작품 <마농>에서 감지되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느낌과는 달리, 다소 묵직한 분위기의 음악으로 독일적 성격을 다분히 띤다.
쥘 마스네가 괴테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188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파르지팔> 공연 관람을 위한 여행이다. 극작가 하트만과 함께 떠났던 여행 중 마스네는 괴테 소설 인물의 모델이 되었던 진짜 샤를로테의 집을 방문했다. 이때 하트만은 오페라 대본을 제안하며 마스네에게 작곡을 권유하였고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베르테르>이다.
인간 내면의 존재론적 고뇌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극적으로 표현한 걸작 <베르테르>는 프랑스 오페라이지만 독일 낭만주의 분위기가 강하다. 1892년 2월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독일어로 초연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제네바에서 프랑스어로 초연되었다.
마스네는 <베르테르>를 통해 새로운 컨셉을 제시한다. 즉, 극 중 드라마 진행을 잠시 멈추고 솔로 성악가에 집중하는 <이탈리아식 아리아>에서 벗어나, 극적 흐름 안에서 스토리를 함께 전개하는 <융합형 아리아>의 개념을 정립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마스네의 기존 작품과는 달리, 합창이나 발레가 (프랑스 오페라 전통) 극 중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특징인데, 이는 드라마의 진행에 더 집중하고자 함이다. 마스네 오페라의 또 다른 특징은 열정 모티프, 알베르트 모티프, 소피 모티프 등 상황이나 인물을 암시하는 주제 선율(레이트모티프)이 감지된다는 점인데, 이는 바그너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원작에서보다 더욱 부각된 오페라 등장인물의 심리와 존재감
괴테의 원작에서는 주인공 이외 인물들의 심리 상태는 크게 다루어지지 않은 반면, 마스네의 오페라에는 조연급 인물들의 심리 상태까지 세밀하게 드러난다는 점 또한 중요한 특징이다. 원작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소피는 샤를로테 못지않게 베르테르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여인으로 그려지고, 원작에서 그저 평범하고 건실한 인물로 그려진 알베르트는 오페라에서는 과격하고 권위적인 인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4막에 이르러서는 극작술이 더더욱 극대화된다. 성탄 전야 부분에서 네 명의 주요 인물이 사중주 설정으로 등장하고 그들의 감정은 더더욱 부각되면서 긴장과 드라마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마스네의 음악적 특징을 주목해보면, 극 중 낭만성은 현악이, 드라마적인 부분은 금관이 표현하고 있다. 괴테가 원작에서 자연경관의 변화로 인물의 심리 변화를 묘사했다면 마스네는 오케스트라를 통해 음악으로 묘사하고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사회적 야망 실현을 위한 매개 인물은 다름 아닌 샤를로테이다. 크리스토프 루와가 의도한 미장센에서 완벽한 자연은 베르테르가 추구하는 완벽한 이상향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완벽한 여인 샤를로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무대에 등장하는 겨울 정원의 의미를 들여다보자. 완벽하게 정돈되고 가꾸어진 그곳은 젊은 베르테르가 진입하고자 하는 부르주아 사회인 반면, 샤를로테의 입장에서는 간절히 벗어나고픈 삶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자연 그대로가 아닌 인위적으로 정돈된 그곳은 답답한 사회적 규약이다.
자신의 사회적 이상향을 찾아 방황하는 젊은 베르테르는 사랑과 야망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절망하다가 결국은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데, 이점은 샤를로테를 더더욱 슬픔과 곤경에 빠트린다. 심지어 이번 미장센에는 샤를로테의 슬픔과 갈등이 더더욱 부각되어 있어 <샤를로테의 슬픔과 고뇌> 쯤 되는 제목도 충분히 성립될 수 있을 듯하다.
요하네스 라이아커(Johannes Leiacker)가 고안한 고전적이면서 절제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무대 디자인은 연출가 크리스토프 로이의 미장센 의도에 바짝 다가간 설정으로 보인다. 부르주아 집 안의 거실과 부엌, 그 바로 뒤편의 정원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알리는 계절의 변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물들의 심리적 긴장 상태와 그 변화를 시시각각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마스네의 음악은 마르크 르루아-칼라타유 (Marc Leroy-Calatayud)가 지휘하는 레 씨에끌 악단의 연주로 미장센이 의도한 인물들의 심리적 배경 역할을 효과적으로 배가시켰다.
최적의 리릭 테너 벤자민 베른하임, 마리나 비오티의 폭넓은 표현력
본 미장센은 지난해 라 스칼라에서 초연된 바 있다. 같은 미장센이지만 다행히도 매번 상연마다 새로운 출연진의 등장은 작품에 개성과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베르테르 역은 리릭 테너(Lyric Tenor)의 감정 표현력과 아름다운 음색이 중요한 역할이다. 벤자민 베른하임은 바로 이러한 장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프랑스 레퍼토리 전문 성악가답게 완벽한 프랑스어 딕션을 자랑한다.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운명에 항변하는 연기, 유려한 테너 창법으로 무리 없이 상승하는 그의 고음은 낭만주의의 절정을 상징하는 인물 베르테르 그 자체이다. 연출가는 베른하임의 연기가 맘에 드는 이유로 그는 센티멘탈리즘에 함몰되지 않고 이성적 분석으로 역할에 접근한다는 점을 꼽으며, 베르테르 역은 무엇보다도 중간 컬러의 보이스로 읊조리는 듯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역할인데 그는 이 점에서 탁월하다고 덧붙였다.
메조소프라노 마리나 비오티는 샤를로테라는 인물 안에 내재된 각양각색의 캐릭터, 즉 다소곳하고 책임감 있는 장녀 (가족 내에서 아버지와 어린 형제 자매들이 기대하는), 현모양처 (엄마가 원하고 알베르가 기대하는),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진 여인 (베르테르를 향한 감정) 등 다양한 성격을 연기했는데, 상황에 따라 가녀린 비브라토 혹은 폭발하는 듯한 금속성의 목소리로 전환하며 폭넓은 표현에 집중했다.
알베르트를 분한 쟝-세바스티앙 부의 연기력도 기억에 남는다. 특히 베르테르가 샤를로테에게 보낸 편지 꾸러미를 발견하고 하나씩 읽어 내려가는 장면이 압권인데, 그는 분노가 가득한 표정 연기로 배신감을 표현했다. 두텁고도 밀도 있는 그의 바리톤 음색은 그의 연기와 어우러져 드라마틱하게 객석을 전율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