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보세요, 당신의 감정이 반응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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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연진의 오늘의 미술"야, 이건 나도 그릴 수 있겠는데!"
색으로 말하는 작가 션 스컬리
대구미술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단순한 색띠 앞에서 누군가 툭 내뱉는다. 언뜻 보면 정말 그럴듯하다. 형상도 없고, 복잡한 붓질도 없다. 단지 색띠들이 수평으로 차곡차곡 쌓여 있을 뿐. 마치 무지개떡처럼 단순해 보이는 션 스컬리(Sean Scully)의 작품들. 하지만 이 단순함 안엔 오히려 더 깊은 의도와 감정이 숨어 있다.
"이게 무슨 뜻이지?” 추상미술 앞에 서면 으레 떠오르는 질문이지만, 이상하게도 스컬리의 그림 앞에서는 그 질문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 색 하나하나가 마치 무언가를 조용히 속삭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의미를 '이해’하기보다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언어다.
스컬리는 자신의 작업이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처음엔 쉽게 와닿지 않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실감이 난다. 겹겹이 쌓인 줄무늬는 멀어진 사람들 사이의 거리처럼 보이고, 충돌하는 색의 긴장감은 이별 뒤의 감정처럼 요동친다. 얼핏 차가운 추상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가 살아 있다.
이 이야기를 알고 다시 작품을 바라보면, 문득 떠오르는 여름 저녁의 기억, 바람의 냄새, 누군가의 옆모습 같은 장면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스컬리의 추상은 그렇게 관객의 기억을 조용히 흔든다. 마치 내면을 비추는 거울처럼 말이다.
관객은 이 조각들 주위를 천천히 돌며,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변화무쌍한 패턴을 경험하게 된다. 스컬리는 관객이 작품 속으로 들어오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해석보다 중요한 건, 그 안에 잠긴 감정을 따라가 보는 일이다.
이는 작가의 개인사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스컬리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큰 상실을 겪었고, 이 시기의 작업들은 어두운 색조와 금 간 감정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가 치유의 시간이었고, 감정을 건너는 다리였다. 스컬리의 추상은 개인의 고통을 보편의 언어로 번역하며, 우리 모두의 감정을 꺼내어 말없이 어루만진다.
그리고 그 감각은 전시장을 나선 뒤에도 계속된다. 창밖의 건물, 횡단보도의 줄무늬, 저녁 하늘의 수평선 등 어느새 우리는 일상 속에서 다시 스컬리의 색과 구조를 만나게 된다. 스마트폰을 꺼내 그 순간을 포착해보자. 프레임을 맞춰보고, 색을 조정해보자. 그러다 보면 당신도 어느새 스컬리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지 모른다.
혹시 당신이 대구미술관에서 션 스컬리의 작품을 만난다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걸어보자. 색과 형태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나 감정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과 작품 사이에 시작된 대화다. 추상은 어려운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의 감정을 담아내는, 가장 솔직한 시각의 언어다.
정연진 독립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