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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수성동계곡에선 '몽유도원도'의 그 복숭아꽃을 만날 수 있다

[arte] 한이수의 서촌기행

안견의 와 수성동계곡
2009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 로비가 사람들로 꽉 채워졌다. 8시간을 기다려 고작 30초 동안 그림 한 점을 감상했다.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 전시한 그림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였다. 도원(桃源), 복숭아 꽃밭에서 노니는 꿈을 그린 그림. 조선 초기의 화가 안견(安堅, 생몰년 미상)의 작품이다.

1447년에 그린 그림이니 500년이 훌쩍 넘었다. 그림의 소장처가 국내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의 소유는 일본의 덴리대학교도서관이다. 우리의 문화재가 외국으로 많이 유출된 것은 알지만 어떻게 이 그림은 일본으로 간 것일까? 일본에서 중요문화재 회화 제1152호로 지정돼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 시마즈 요시히로가 찬탈해 갔다는 것으로 전해지는 그림이다.
안견 &lt;몽유도원도&gt;(1447), 비단에 수묵담채, 38.7 x 106.5㎝, 일본 덴리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그림을 살펴보자. 그림은 3개의 장면으로 나누어진다. 그림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펼쳐지는데, 현실 세계와 무릉도원, 그리고 도원을 찾아가는 여정이 현실 세계와 무릉도원 사이에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복사꽃 피는 도원이 인간 세계에서 도달할 최고의 이상향이었다. 계절은 요즘과 같은 4월 말에서 5월 초일까? 우측 이상향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다. 사실 우리나라 봄의 색깔은 개나리 같은 노란색이 아니었다. 연분홍빛 복사꽃의 색이다. 인왕산 아래 저마다 복숭아를 심어 열매는 물론 물이 올라 새색시 얼굴빛처럼 발그스름한 복사꽃을 맘껏 감상했다. 어느 봄날 만개한 복숭아꽃을 노을빛 속에서 역광으로 본 적이 있다. 조상들이 왜 도원을 최고의 이상향으로 생각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래서 현실 세계에서 고달픈 사람들은 도원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도원에 이르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 내를 건너 계곡과 절벽 위로 난 소로를 지나고 암굴도 거쳐야 한다. 아마도 도달하려면 맹수를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림 오른편의 복숭아꽃이 만발한 곳에 도달하면 그동안의 고생이, 넋을 잃도록 아름다운 풍광에 위로를 받을 것이다.

세종의 셋째 아들 풍류 왕자 안평대군(1418~1453)은 1447년 어느 봄날 이런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그는 즉시 조선 최고의 화가 안견을 불러 꿈 이야기를 꺼내며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안견은 조선 최고의 화가답게 3일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
수성동계곡 우측에 있는 복사꽃 / 사진. ©한이수
아름다운 도원의 세계. 그러면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보았다는 곳은 어디일까? 그가 꿈꿀 당시 거처는 이 수성동계곡의 중턱 즈음 '비해당(匪懈堂)'이라는 곳이다. '비해'는 시경에 나오는 구절(夙夜匪解 以事一人)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 임금 한 분만 섬긴다는 뜻이다. 1442년 6월 안평대군이 집을 짓고 경복궁에 아버지 세종을 찾아가 받은 당호다. 딴맘 먹지 말고 세종의 큰아들이자 첫째 형인 문종을 잘 섬기라는 당부와 함께 당호를 내려준 것이다. 안평대군은 큰형 문종과 그의 아들인 조카 단종을 잘 보필했지만 결국 둘째 형 세조가 내린 독배를 마시고 서른여섯의 나이로 짧은 삶을 마감했다.

그가 밤낮으로 풍광을 보며 산 곳이 이곳이다. 꿈은 현실의 반영이다. 수성동계곡의 아름다운 모습이 마음속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특히 인왕산은 복사꽃이 유명해서 필운상화(弼雲賞花, 필운대 꽃 구경)가 봄 장안을 술렁거리게 했다. 안평대군은 봄밤 꿈결에 복사꽃 핀 이곳 풍광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래서 몇몇 연구자들은 수성동계곡과 몽유도원도의 화각이 일치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 수성동계곡에는 몽유도원도에 등장하는 복숭아꽃 몇 그루가 연분홍빛을 뿜으며 아름답게 서 있다. 비해당 터가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계곡을 따라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정자가 있다. 이곳은 요즘 같은 봄날, 비가 그치고 올라가면 너무도 운치 있는 곳이다. 조선 초, 이곳에 살았던 풍류 왕자 안평대군은 볼 수 없지만 그 시절의 풍취는 느껴볼 만했다.
정선 &lt;필운상화(弼雲賞花)&gt;(1750년경), 종이에 담채, 27.5 x 18.5cm, 개인 소장
수성동에서 몇 개월 동안 그림만 그렸던 화가가 있다. 우리가 너무도 사랑하는 이중섭(1916-1956)이다. 수성동계곡에서 내려와 옥인길로 올라가다가 주차장 맞은편 계단으로 내려온 좌측 골목 끝에서 첫 집, 누상동 166-202번지다. 이곳에서 이중섭은 조카 이영진과 1954년 6월부터 10월까지 반년 이상을 살았다. 이곳에서 그린 대표작이 <흰 소>이다.
옥인길 전경 / 사진. ©한이수
옥인길에 위치한 이중섭이 살았던 공간 / 사진. ©한이수
시인 김광림은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누상동 이중섭 집에 머무르며 당시의 상황을 기록했다.

"그가 기거하는 이층 다다미방은 스산했다. 가구도 침구도 없는 슬리핑백 하나로 뒹굴고 있었다. 웅크려 사는 생활인데도 호박덩이를 하나 크게 그려놓고 얼마나 편한 자세냐 하며 좋아했다."
-김광림, 「나의 이중섭체험」

원래 이중섭의 고향 원산의 친구 정치열이 살았는데 그 집에서 묵으며 이듬해 예정된 미도파화랑의 개인전을 준비했다. 그는 식사도 거르다시피 하고 온전히 작품 활동을 하며 밤을 새웠다. 잠이 오면 인왕산 수성동 풀덤불 사이의 수성동 계곡물로 몸과 마음을 닦았다. 몸을 닦고 바위산 마루에 오르면 달이 보였다. 계곡 바위에서 달을 보며 일본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 만날 날을 그리워했다. 아마도 이중섭이 가장 깨끗한 마음으로 집중해서 작품 활동을 할 때가 이곳 수성동 계곡 바로 아래 누상동에서 기거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시 '인왕산 달빛'에는 일본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꾹꾹 묻어난다.

나의 상냥한 사람이여/한가위 달을 /혼자 쳐다보며/당신들을 가슴 하나 가득/품고 있소
'이중섭 작품집' 일부 / 출처. 이중섭미술관
그는 미도파백화점 4층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955년 1월 18일부터 1월 27일까지 이어졌다. 총 45점을 출품했다. 전시 안내장의 축사는 김환기가 써 주었다. "중섭 형의 그림을 보면 예술이라는 것은 타고난 것이 없이는 하기 힘들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진다. -중략- 중섭형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미술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전시회의 수익금으로 아내를 만나러 가려고 했다. 전시회는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아주 실패한 것도 아니었고 찾는 사람도 제법 많았다. 45점 중 20점이 팔렸다.
1955년,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의 이중섭 / 출처. 이중섭미술관
그런데 악재가 찾아왔다. 그의 은지화의 벌거벗은 아이 모습이 미풍양속을 저해한다고 경찰이 철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팔렸던 그림 대금이 회수되지 않았다. 돈을 받으려고 찾아가면 문전박대가 일쑤였다. 그나마 받은 돈도 동료들의 술값으로 다 날렸다. 그림 1점이 3원, 그림 3점 팔 정도의 그림 값이면 일본으로 갈 여비가 되었지만, 그의 수중에는 한 푼도 있지 않았다. 이런 실망감은 병이 되었다.

친구들의 주선으로 대구로 내려가 다시 개인전을 열었고 이곳에서 미국문화원 외교관 맥타가트의 주선으로 이중섭의 은지화 석 점을 구입하여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전시회에서도 작품 수입은 없었다. 그가 만년에 영혼을 쓸어 넣어 준비한 전시회는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이런 것들이 병으로 나타나 이듬해인 1956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사망에 이르게 됐다.

2016년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서울시립미술관 덕수궁 별관에서 개최될 때,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은 것을 묻는 설문 조사가 있었다. 예상외의 결과가 나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중섭의 작품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황소>와 같은 박진감 넘치는 작품이 아니었다. 가장 서정성이 빛나는 <복사꽃 위의 새>였다. <벚꽃 위의 새>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중섭이 벚꽃을 그린 경우가 없고 아이들을 그린 그림에도 복숭아가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복사꽃이 자연스럽다는 의견이 많다.
이중섭 &lt;복사꽃 위의 새&gt;(1954년), 종이에 유채, 49.7☓32.3cm
분홍 꽃 위로 비둘기가 사뿐히 내려앉자, 꽃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놀란 개구리는 가지 위로 도망가고 벌은 꽃향기에 취해 윙윙거린다. 그림의 전체적인 색채가 너무도 아름답다. 연한 하늘색 바탕에 분홍 꽃잎의 색채 조화가 뛰어나다. 그리고 그림에 등장하는 봄날의 서사가 미소 짓게 만든다.

1954년에 그려졌으니 아마도 옥인길에서 한참 창작열을 불태울 때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자료를 찾아보니 그렇지는 않았다. 서울 올라오기 전 통영에서 그린 그림이다. 현재 이중섭이 살던 집에는 서예가가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가옥인데 많은 빌라들이 집을 둘러싸고 있어서 고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중섭이 이곳에서 살았을 때는 전망이 탁 트여 남산까지 바라다보였을 것이다. 이 집에서 이중섭은 오로지 미친 듯이 그림만을 그렸다. 그가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릴 때는 복사꽃으로 유명한 수성동계곡 아래에서 살았다. 안평대군의 꿈속에 나타났던 그 복사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중섭의 그림에도 등장한다. 수성동계곡에는 더 많은 복사꽃을 심어 <몽유도원도>와 이중섭의 꽃을 추억해야 한다.

한이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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