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통령 선거가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속보가 뜨고 사람들 마음이 요동치는 판이라 앞일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으니, 가만히 지난 일을 돌아보며 선거와 노래가 얽혔던 풍경이나 한번 살펴볼까 한다. 사상 최초로 민주적 선거가 치러졌던 1948년 5월, 77년 전 제헌의회 선거 당시의 이야기다.
투표 날짜를 따서 5·10선거라고도 불리는 제헌의회 선거는 대한민국의 기틀을 잡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참여 열기가 워낙 뜨거웠던 덕에 투표율이 95.5%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는 대규모 부정으로 무효가 된 1960년 3·15선거의 97%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역대 최고 기록이다. 선거 결과로 뽑힌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제헌의회에서는 헌법을 만들어 7월 17일에 공포했고, 그 헌법에 따라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그런데, 5·10선거가 모두의 기대와 참여 속에 마냥 순조롭게만 진행되었던 것은 사실 아니다. 38선 이북 유권자들이 참여하지 않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였기에, 그에 대한 불안과 비판 또한 만만치 않았다. 유력 정치인 중에서도 이승만(李承晩)은 서울 동대문구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나아가 대통령으로까지 선출되었지만, 김구(金九)는 남북 분단이 불가하다며 선거에 불참했다. 한 달 전부터 4·3사건으로 극심한 혼란과 공포에 빠져 있었던 제주도에서는 아예 투표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해 1년 뒤에야 국회의원이 선출되기도 했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8일자에 실린 <울어라 은방울> 광고 / 제공. 이준희 당시 신문에 실린 <울어라 은방울> 광고를 보면, 우선 '대망 5년! 옛 진용 그대로 재등장한 오케 해방 제1성!!'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울어라 은방울>을 발매한 음반회사가 오케(Okeh)레코드고, 오케레코드 음반이 5년 만에 다시 등장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오케레코드의 해방 전 마지막 음반이 1943년 말 또는 1944년 초에 발매되었으니, 크게 문제가 있는 표현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이름이 같기는 해도 해방 전 오케레코드와 <울어라 은방울>을 발매한 해방 후 오케레코드가 같은 회사였던 것은 또 아니다. 해방 전 오케레코드는 일본 음반회사 데이치쿠(帝蓄)레코드의 경성 지점이었고 해방 후 오케레코드는 1947년 봄쯤에 새로 설립된 곳이니, 둘 사이에 직접 관계는 없다. 다만 상호나 상표, 그리고 참여 인물 면에서 상당한 공통점이 있기는 했다.
조명암, 김해송, 장세정 역시 모두 해방 전 오케레코드를 대표하는 전속 작가와 가수로 활동한 바 있다. 세 사람이 함께 만들어 오케레코드 음반으로 나온 여러 히트곡 가운데 특히 인기 있었던 노래가 1941년 2월에 발매된 <역마차>인데, <울어라 은방울>은 그 <역마차>의 해방 후 계승작으로서도 의미 있는 곡이었다. 가사 첫머리가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이고, 그에 따라 제목도 <해방된 역마차>로 불리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음반에 김해송과 장세정의 이름은 보이지만 작사자 조명암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대신 '문예부 작시' 표기가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음반 발매 얼마 뒤 1948년 6월쯤 간행된 <울어라 은방울> 악보에는 작사자 이름이 이가실(李嘉實)로 표기되어 있고, 이가실은 본명이 조영출(趙靈出)인 조명암의 또 다른 필명이므로, 그가 가사를 썼음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왜 음반에서는 작사자 이름을 그처럼 애매하게 은폐했던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쩌면 <울어라 은방울> 가사에 논란이 생길 수 있음을 작자 또는 오케레코드에서 우려했기 때문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제2절 가사의 표현은 보다 직설적이다. 자유의 종이 울어 8·15는 왔지만, 독립의 종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고 있다. 탑골공원과 함께 기미년 만세시위의 상징적 공간인 보신각 앞에 왔는데도, 그 보신각에 걸린 종은 독립의 소리를 울리지 못한 채 여전히 잠들어 있다. 며칠 뒤 제헌의회 선거가 치러질 참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독립은 아니라는 것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두 번째 상황이다. 가사로 인한 논란에 대해 누군가의 우려가 정말 있었다면, 그것은 필시 제2절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3절에서는 다시 은유적 표현이 대거 등장하는데, 결국 주목해 볼 것은 덕수궁이라는 공간이다. 1948년 5월에 발표된 <울어라 은방울> 가사가 쓰였을 때는 아마 그보다 몇 달 앞선 1947년 말에서 1948년 초 사이였을 것이다. 그즈음 덕수궁에서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가 <울어라 은방울>에서 말하고자 하는 세 번째 상황이다. 덕수궁은 1947년 5월부터 10월까지 미국과 소련의 제2차 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고, 10월 21일에 소련 대표단이 회의를 접고 철수하면서 공동위원회는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그에 따라 한반도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국제적 조건은 크게 악화될 수밖에 없었고, 이후 결정된 것이 분단과 무관치 않은 5·10선거였다.
남북 분단이 진정한 독립일 수 없음을 노래로 밝힌 작사가 조명암은 1948년 늦가을 무렵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갔다. 그래도 <울어라 은방울>의 유통에 당장 어떤 큰 문제가 아직은 발생하지 않았다. 오케레코드 뒤를 이어 등장한 서울레코드에서도 첫 번째 음반으로 장세정이 새롭게 녹음한 <울어라 은방울>을 <해방된 역마차>란 제목으로 연말쯤에 발매했고, 비슷한 시기에 미미악단의 악극 <해방된 역마차>가 상연되기도 했다. 문제는 이듬해 1949년 6월에 일어난 뜻하지 않은 사건에서 비롯했고, 그 때문에 <울어라 은방울>, 즉 <해방된 역마차>의 운명은 크게 뒤틀리고 말았다.
국제신문 1948년 12월 17일자에 실린 미미악단의 악극 <해방된 역마차> 광고 / 제공. 이준희1949년 6월 26일 오후 12시 40분쯤, 서울 경교장(京橋莊)에서 김구가 총격을 받아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 안두희(安斗熙)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김구를 만나기 위해 경교장 2층으로 올라갔을 때 라디오에서 노래가 들리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고, 그 노래가 하필 <해방된 역마차>였음이 밝혀졌다. 당초 김구와 아무 관련 없었던 곡이 이제 그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연상케 하는 노래가 돼 버린 것이다. 남북 분단과 5·10선거에 대한 입장 차이로 갈라선 뒤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정적(政敵)이 된 김구의 충격적인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자꾸만 상기시키는 노래 <해방된 역마차>는 정권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949년 10월에는 가사가 불온해 민심 수습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해방된 역마차> 음반에 대한 압수 조치가 내려졌다. 사상 처음 대중가요로 명명되었던 노래 <울어라 은방울>은 그렇게 대한민국 공식 금지곡 제2호가 되었다.
동광신문 1949년 10월 20일자에 실린 <해방된 역마차> 음반 압수 기사 / 제공. 이준희대중예술이 정치와 맺는 관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의견이 있을 수밖에 없다. 77년 전 <울어라 은방울> 가사에 대해서도 다양한 생각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나 의견이 어떻든, <울어라 은방울>을 오늘 다시 들어 보는 것은 일단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태극기 휘날리며 달리는 역마차의 모습을 음표로 그려낸 김해송의 솜씨는 지금도 탁월한 박진감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