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민이 연기 중단하고 '김금희 소설' 출판한 이유
출판사 '무제' 대표 박정민 인터뷰
무제 제공
배우 박정민(38)이 지난해 말 “연기를 1년 쉬겠다”고 ‘활동 중단’을 선언해 이목을 끌었다. ‘동주’ ‘그것만이 내 세상’ ‘전,란’ ‘하얼빈’ 등 출연하는 작품마다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14년 차 다작 배우이기에 그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올 3월까지 남은 영화 촬영을 마치고 정말 ‘배우 휴식기’에 돌입한 그는 또 다른 직업 ‘출판사 대표’로 변신했다.
‘기자님 안녕하세요. 배우 박정민이라고 합니다.’ 그가 운영 중인 출판사 ‘무제’에서 최근 김금희 작가의 신작 소설 <첫 여름, 완주>를 출간하며 기자들에게 직접 보낸 보도자료 메일도 화제가 됐다. 통상 종이책을 먼저 내놓는 것과 달리 오디오북부터 발표한 새 프로젝트를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저희 회사 첫 책 <살리는 일>이 출간될 즈음 아버지께서 시력을 잃었다”며 “아들이 만든 첫 책을 보여드릴 수 없단 생각에 조금 상심했고, 아버지께 책을 선물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가 ‘듣는 소설’이라는 것을 기획하게 됐다”고 밝혔다. “다른 소설보다 대사가 좀 많은, 어쩌면 반 희곡 형태의 소설”이라고 덧붙였다.
출판사 대표 박정민은 요새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자정 넘어까지 일하며 책 제작과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를 서울 서교동 ‘무제’ 사무실에서 만났다.
서울 서교동 출판사 ‘무제’ 사무실의 박정민 책장. 설지연 기자▷출근해서 무슨 일하고 있었나요?
"책 보낼 곳 명단 정리하고, 청소하고, 인터뷰 준비를 좀 했어요. 보통 오후 6시까지는 서점, 인쇄소 등 업체와 커뮤니케이션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있어요. ‘무제’는 대표인 저 외에 브랜드 마케팅하시던 분을 영입해 2인 출판사로 운영 중이거든요. 밤에는 블로그, 서점 사이트 등에 올릴 책 홍보 글 작성 등 혼자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현재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일은 뭔가요?
"<첫 여름, 완주> 홍보죠. 어떻게 책을 계속 노출할 수 있을까. 다음 달엔 서울국제도서전에도 나갈 예정이라 그와 맞물린 홍보 플랜도 준비 중이에요. 도서전에서 신간도 소개할 계획입니다. '무제' 유튜브도 계속 운영해야 하는데, 어떻게 진행을 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네요."
▷출판사 운영의 실무를 직접 하고 있는데, 할만합니까.
“네 재밌어요. 아직까진 책도 잘 되고 있고 큰 문제는 없어요. 사실 <첫 여름, 완주>는 이제 세상에 내놨으니 책의 힘으로 갈 수 있게 두고 다른 책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굿즈 출시, 전시 등 이 책으로 파생되는 2차 콘텐츠가 많아서 완전히 안 끝난 것 같은 느낌이네요.”
▷한 달여 전까지만 해도 영화 촬영장에 있었는데, 배우가 아닌 다른 일을 해보니 어떻습니까.
“여러모로 느끼는 게 있어요. 우선 ‘촬영할 때 내가 이 정도로 열심히 한 적이 있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촬영 끝나고 ‘너무 졸리다’ 싶었던 적은 별로 없거든요. 출판사 일은 마치고 집에 갈 때 진짜 잠이 막 쏟아져요. 촬영은 여럿이 하는 일이니, 힘의 분배가 가능하고, 제가 경력이 쌓여 어느 정도 요령도 알고 있거든요. 반면 이 일은 혼자, 처음 하는 것들이라 더 힘든 것 같아요. 그래서 나중에 다시 연기를 할 땐 ‘진짜, 진짜 더 열심히 해봐야 하겠다’ 싶어요. 당시에도 열심히 한다곤 했지만, 어느 정도까지만 했던 것 같아요.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무언가가 내 안에 있었더라고요.”
▷그렇게 잠이 쏟아지게 할 만큼 에너지를 많이 쓰게 하는 부분은 뭔가요?
"일단 머리를 써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요. 책 홍보를 위해 써야 하는 글도 어쨌든 제가 창작해야 부분이니까. 하다못해 굿즈 제작도 그냥 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계속 고민하고 들여다보다 보니 눈도 침침해지네요."
▷<첫 여름, 완주> 출간 보도자료를 내면서 시각을 잃은 아버지 등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꽤 긴 글을 통해 밝혀 화제가 됐습니다. 보도자료는 직접 써보니 어땠습니까.
"보도자료 쓰는 게 어렵더라고요. 그런 글을 써본 적이 없으니까. 바쁜 기자들에게 그렇게 장문의 메일을 갑자기 툭 보내 그걸 다 읽게 하는 게 맞는지도 한참 고민했어요. 저로선 처음 인사를 드리는데 그냥 '안녕하세요. 보도자료 첨부합니다' 하는 게 좀 어색해서 글을 썼던 거였죠."
▷당초 출판사 운영에서 ‘배우 박정민’을 부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이번 신간을 내면서 전면에 나서고 있습니다.
“영화배우로서 나를 막 드러내 출판사를 운영하는 게 기존 출판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있었어요. 약간 반칙 같은 느낌이랄까요. 사실 그 느낌은 아직 유효합니다. 다만 내가 우선적으로 예의를 차려야 되는 사람들은 우리 작가님들인 것 같더라고요. 나를 믿고 글을 써준 작가님들한테 내가 배우로서 품위를 지키겠다고 뒤로 빠져 있는다면 이것도 좀 꼴불견이다 싶었어요. 선배 출판인들께 좀 누가 되더라도, 작가님들 챙기는 게 우선이겠다 싶어서 제가 조금 전면으로 나서기 시작을 한 거죠.”
▷오디오북 기획 과정이 궁금합니다.
“2020년 무제에서 <살리는 일>을 출간하고 1년 지나서였어요. ‘다음 책은 뭘 만들지’, ‘누가 우리한테 글을 줄까’ 생각이 많았죠. 그러다 문득 ‘아버지한테 책을 선물하려면 오디오북 같은 게 있어야 되겠는데’ 싶었어요. 김금희 작가님이 소설을 써주셨으면 해서 기획안과 영화 ‘아가씨’ 시나리오 발췌본을 보내드렸어요. ‘대사가 많은 소설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거든요. 이 소설의 형태를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이 있었는데, 당시 제가 참여했던 영화가 ‘헤어질 결심’이었어요. 이 작품의 대본이 다른 대본들하고는 좀 달랐어요. 문학적인 느낌이 강했죠. 내가 생각하는 소설과 가장 유사한 형태다 싶었어요. 희곡, 시나리오는 지문이 별로 없는데, 저는 지문·서술에 들어가는 문장도 아름답고 구체적이길 바랐어요. ‘헤어질 결심’은 개봉 전이었기 때문에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의 전작인) ‘아가씨’ 각본을 보내드렸죠.”
▷김금희 작가를 '듣는 소설' 프로젝트의 첫 작가로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제가 그분 소설을 무척 좋아해요. <경애의 마음>, <너무 한낮의 연애>를 비롯해 <복자에게>를 가장 좋아하죠. 문장이 너무 아름답고 예쁘잖아요. 그러면서도 대사는 참 우습고요. 가슴을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의 문장, 대사들이 좋았어요. 문어체인데도 구어체처럼 느껴지게 하는 매력도 있죠. ‘작가님이 시작을 해주면 진짜 좋겠다’ 싶어 말씀드렸는데 믿기지 않게 흔쾌히 수락해 주셨어요. <첫 여름, 완주>는 유독 더 입에 잘 달라붙게 구어체로 잘 써주셔서 너무 좋았죠.”
▷오디오북을 들은 아버지 반응이 어땠나요?
“그냥 ‘재밌더라’ 정도. 아버지랑 대화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아버지도 아들내미한테 살가운 스타일은 아니셔서요. 그래도 ‘재밌다’고 하셔서 ‘듣긴 하셨구나’ 했습니다.”
▷이 책의 오디오북은 기존 오디오북과 상당히 다릅니다. 고민시, 김도훈, 최양락, 염정아, 김의성, 김준한 등 목소리만 들어도 알법한 유명 연예인들이 성우로 참여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음향 효과에 굉장히 공을 들인 티가 납니다.
“성우 한두 명이 책을 쭉 읽어주는 기존 오디오북은 저는 진입장벽이 좀 있다고 봤어요. 아버지, 또 시각장애인분들한테 책을 선물할 거라면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 라디오 드라마 같은 걸 하나 만들어 풍성하게 표현하면 재밌겠다 싶었죠. 그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비장애인 독자들까지 오디오북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돼 줄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오디오북 연출은 직접 한 건가요? 섬세한 음향 효과 덕에 소리만으로도 계절의 시각, 촉각, 후각까지 느껴지는 것 같던데요.
"노력을 많이 했는데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웃음) 연출을 직접 했는데, 그 작업만 6개월 걸렸어요. 해외 촬영 중에도 계속 파일을 받아서 들었죠. 부족한 소리는 깎고, 레이어를 쌓으며 봄·여름 시골에 가면 들리는 소리를 만들어 넣으려고 노력했어요. 시골 할머니 집에서 백열등 켜면 ‘찡’ 소리 나잖아요. 그런 것까지도 들리면 좋을 것 같았어요. 음향으로 공간감이나 시간, 인물의 심리·감정까지도 표현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서 오래 만졌죠. 오디오북이 총 5시간 정도 나오거든요. 한 번 편집을 시작하면 한 시간 분량 작업하는 데만 하루가 통으로 다 가요. 그런데 다음 날 다시 들어보면 또 고치고 싶은 게 생겨요. 진도를 못 나가고 또 지지부진 하는 거예요. 오픈하는 마지막 날까지도 ‘한 번만 더’ 그러면서 수정했어요. 윌라 직원분이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죠.”
▷유명 배우들이 성우로 참여하니 목소리만 듣고도 캐릭터 이미지가 연상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배우들은 재능기부 형식으로 참여했나요?
"네. 모두 감사하게도요. 밥 한 끼 사드린 분 있고 못 사드린 분 있고 그러네요. 목소리로 연상이 딱 되니까 저는 좋더라고요."
▷라디오 DJ 신해철 역은 직접 연기 했습니다.
"사실 신해철 선배님 목소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이 엄청 많았어요. 백방으로 알아봤어요. 성대모사 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나. '신해철의 FM 음악도시' 말고 차라리 '박정민의 FM 음악천국' 같은 다른 가상의 라디오를 만드는 방안도 얘기했어요. 하지만 작가님이나 저나 아깝더라고요. 마왕 신해철의 고스트네이션은 좀 대단한 거였잖아요. '마왕 신해철'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이 있는데, 그걸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굳이 왜 신해철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 생각이 미치더라고요. 처음 녹음분엔 제가 신해철 선배님의 말투, 목소리를 따라 한 게 있어요. 근데 듣다 보니 너무 싫은 거예요. '아, 이건 오히려 방해다' 싶었죠. 그냥 '내가 만약 라디오 DJ를 한다면 어떨까', '조금 진중한 DJ로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다시 녹음했어요. 이건 누구한테 부탁하기도 어려웠어요. 부담스러운 역할이니 욕을 먹어도 내가 먹지 싶었죠."
무제 제공▷소설인데도 책에 지문 형태로 음향에 대한 디렉팅이 적혀 있습니다. 이런 건 처음부터 김금희 작가에게 요청한 건가요?
"제가 음향까지 표현해 달라고 한 적은 없어요. '반 희곡의 느낌이었으면 좋겠다' '음악도 들어갈 거니 풍부하게, 그냥 편하게 쓰셔도 좋다'는 말씀 정도를 드렸죠. 작가님이 영화처럼 장면을 상상하며 소설을 쓰셨던 것 같아요. 최종본에선 지웠지만, 원문엔 실제 음악 제목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기도 했어요. 덕분에 오디오북 작업할 때 편했죠. 비슷한 느낌으로 재구성해 만들면 됐으니까요. 음악감독이 또 워낙 잘 해주셔서 느낌이 잘 살았어요."
▷비디오 컨셉의 책 표지도 독특합니다.
“소설에 나오는 중요한 오브제 중 하나가 비디오테이프잖아요. 이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다 슬라이드 케이스를 발견했고, 그 느낌을 살리고 싶었어요. 제 취미가 북 커버, 영화 포스터, 영화 DVD 케이스 구경하며 사진 저장해 놓는 거거든요. 책 제작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하는 거라 돈을 안 아끼려고 해요.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게 많아지죠. 책 케이스까지 만들려면 인쇄비, 인건비가 많이 들거든요. 그에 비하면 책 단가는 낮아요. 그럼에도 재밌게, 좋은 걸 만들고 싶어요.”
▷배우로 번 돈을 출판업에 ‘플렉스’ 하는 건가요?
“아니요. 예전엔 ‘나는 책으로 돈 벌 생각 없어’라는 객기 같은 게 있었어요. ‘돈은 본업으로 벌면 되고, 먹고 사는 데 큰 지장 없으니 하고 싶은 걸 해보겠어’ 같은. 이제는 안 그래요. 출판사에는 최소 자본금 정도만 투자해놨어요. ‘이제 절대로 배우 박정민의 돈을 끌어오지 않겠다’는 게 제 목표예요. 이 회사가 자생적으로 굴러가게 책을 많이 팔고 싶네요.”
▷오디오북은 영상화 생각도 내비쳤던데요. 만약 판권이 팔려 제작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방식을 구상하고 있나요?
"두 시간짜리 작은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어요. 드라마로 하려면 캐릭터, 대사, 관계성, 어저귀의 정체 등 뭔가 좀 덧붙여야 하겠죠. 누군가 만들어줬으면 좋겠지만, 정 안 되면 직접 제작·감독을 해볼까 생각도 있긴 해요. 적은 돈으로 짧은 기간에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물론 작은 영화로 만든다면 지금 이 라인업으론 할 수 없겠지만,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책 애호가라면 독자로서 좋은 책을 읽기만 해도 될 텐데 왜 굳이 작품을 발굴하고 기획해 출판까지 하는 건가요?
“저는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는데 책이라는 물성 자체가 참 좋아요. 예쁜 책 보면 기분 좋고요. 배우도 물론 창작자죠. 하지만 시나리오, 감독 등 제한이 많잖아요. 영화의 톤과 매너에 맞게 연기해야 하고요. 여러모로 기술자인 거잖아요. 책을 만들면 조금 더 창작 욕구가 해소되는 느낌이 있어요. 글은 내가 쓰지 않지만, 누구에게 맡길지, 어떻게 포장하고 편집할지 등을 정할 수 있잖아요. 작가들이 쓴 글을 받아볼 때 느낌이 무척 좋거든요. 내가 만든 책이 세상에 나오는 건 배우 할 때랑은 또 다른 즐거움이에요.“
▷직접 책을 쓸 계획도 있나요?
“출판사를 안정시키는 차원에서 직접 써볼 생각도 있긴 한데, 아직 한 글자도 못 써서 뭐가 될진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제 생각을 파는 것이 조금 싫어요. 2016년 제가 냈던 <쓸 만한 인간>이라는 책을 저는 이제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 당시와 지금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거든요. 저의 20대의 못나고 철없는 생각, 복합적인 모습들까지 그 책에 고스란히 박제된 거잖아요. 물론 지금도 완성된 인간이라고 보진 않지만…. 그런데 이 책으로 유입되는 분들, 또 그걸로 저를 판단하는 분들이 더러 계시더라고요. 내가 쓴 거니까 뭐라고 할 수도 없죠. ‘내 생각을 풀어놓는 것이 좋지 않다’라는 생각을 하는 중이라 에세이가 아닌 글을 써야 하나 싶기도 하네요.”
▷‘무제(無題)’란 이름처럼 ‘이름 없는 것들’, 소외된 것들을 찾아 나서겠다고 했습니다.
“소외된 것들은 모든 구석구석에 다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박정민’의 입으로 특정하는 건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책을 빌리는 거예요. 문학을 통해 은유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고, 보다 직접적으로 얘기할 수도 있다고 봐요. 앞서 출간했던 <살리는 일>, <자매일기>를 통해 동물권에 대한 화두를 던진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렇다고 ‘너희들이 잘못하고 있는 거야’라며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대화를 해보자는 것이죠.”
▷책은 언제부터 좋아했나요?
"저는 굉장히 명확한 계기가 있어요. 고등학교 때까진 교과서, 참고서만 보고 살았어요. 제도권의 주입식 교육에 절여져 있던 학생이었죠. 그러다 첫 대학교를 입학했다 자퇴하고 대형 서점 안에 있는 문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어요. 손님이 많이 안 오는 서점이라 너무 심심하더라고요. 그때 조현철 배우가 제게 김영하 작가 얘기를 했던 게 기억나는 거예요. 한국 소설 코너에 김영하 작가 책이 있길래 집어 든 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였어요. 그걸 재미있게 읽어서 김영하 독파를 한 거죠. 그다음 박민규 작가로 넘어가고, 그러다가 고전도 읽게 되면서 그렇게 책이랑 가까워진 거예요."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인생 소설이라고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 소설은 왜 그렇게 좋아하나요?
"스무살 때쯤 읽었어요. '청춘의 열등감'에 제가 감정적으로 엄청나게 꽂혔어요. 그 책을 당시 품고 살았던 것 같아요. 막 울기도 하고. 그 시절에 저한테 뭔가 찌르는 듯한 느낌이 있었어요. 책을 이제 막 보고 좋아하게 될 무렵이라 이 책이 더 소중한 거예요. '나한테도 뭔가 이런 책이 생겼다'라는 느낌. 박민규 작가님은 오히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같은 소설이 더 유명하잖아요. 저한테는 파반느가 인생 책 같은 느낌이죠."
▷평소엔 어떤 책을 즐겨 읽나요? 책 보는 루틴도 궁금합니다.
"보통 밤에 집에서 봐요. 카페에 가서도 보고요. 책은 잡식으로 읽어요. 문학, 인문, 사회과학, 과학책 다 봐요. 서점을 둘러보다 이거 재밌겠다 싶은 거 읽습니다. 취미 삼아 시나리오를 쓰는데, 그때 필요한 책을 찾아보기도 하죠. 지금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이기호 작가님이에요.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차남들의 세계사> 등이 있죠. <혼모노>를 쓴 성해나 작가님도 좋아해요. 그 책에 실려 있는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를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배우 활동을 1년 정도 쉬겠다고 했습니다. "거울을 보는데 내가 낯설게 느껴졌고, 작품 속에서 봤던 내 표정 같더라. 연기를 하며 몸에 익은 습관이나 틀을 벗어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라고 말했는데요. 아직 한 달밖에 안 되긴 했지만 새로운 뭔가를 발견했습니까.
"억지로 뭔가 새로운 걸 발견하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첫 여름, 완주> 홍보와 도서전이 좀 정리되면 여행도 다녀오려고 하고요. 그러다 보면 '내가 배우라는 일을 정말 좋아했나 보다'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지금도 가끔 좋은 영화를 보면 '저거 연기할 때 재밌었겠다' 싶거든요. 최근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선 영화인·방송인들 보니 신기하고 멋지면서도 '그래, 더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만 쉬지 못하고 계속 촬영에 얽매여 있으면 매 순간 그것만 신경 쓰다 시간이 흘러가 버리니까요. 좀 한 발짝 빠져나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궁금했어요. 사실 촬영 끝난 지 한 달 조금 넘어서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결심을 한 것에 후회는 없는 것 같아요. 어쨌든 배우는 누가 찾아줘야 일을 하는 거니까 (휴식이)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언젠가 다시 뭔가 하러 가면 더 재밌지 않을까요."
▷추천 책 10권을 꼽아주세요.
무제 제공1.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 허수경-편견은 진실을 끌어내는 불가피한 이웃인지도 모르겠다. 그 이웃과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힘으로부터, 어쩌면 진실은 깊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을 수도 있을 것이다.
2. <김상욱의 양자공부> | 김상욱-유일한 근거는 우리의 경험뿐이다. 과학의 역사가 우리에게 일관되게 들려주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으니, 바로 경험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3. <두고 온 여름> | 성해나-누군가를 의심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그래서 도망치는 거라고.
4. <사물의 뒷모습> | 안규철-작품을 만드는 일은 기억될 것과 잊힐 것을 구분하고 그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일이었다.
5.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하재영-동물을 망각하는 것은 내 삶을 구성하고 있는 타자들의 희생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나는 그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그들을 여기에 데려다 놓는 이들이 다름 아닌 우리라는 것을 인정하며 살 수밖에 없다.
6.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박민규-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7. <여기는 서울> | 전춘화-이곳에서 저는 혼란 속에서 과거가 연결되기도 하고 주위에 감응하여 확장되기도 하며, 가끔은 볼품없이 축소되고 부정당하는 자아를 견디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아버지, 여기는 서울입니다.
8. <부끄러움> | 아니 에르노-부끄러움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나에게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부끄러움 뒤에는 오직 부끄러움만 따를 거라는 느낌.
9. <A가 X에게> | 존 버거-무는 처음부터 없던 것이고, 부재란 있다가 없어진 거예요. 가끔씩 그 둘을 혼동하기 쉽고, 거기서 슬픔이 생기는 거죠.
10.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 김이듬-협소한 내 마음에 옮겨 담으려던 것은//당신이 만들지 않은 당신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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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지연의 독설(讀說)'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책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나눠보는 연재 코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