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득의 ASEAN 돋보기] 싱가포르 창이 공항, 하늘길의 기준을 다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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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동남 아시아의 관문이라 불리는 싱가포르의 첫 인상을 결정짓는 곳이 바로 창이 국제 공항(Changi Airport)이다. 창이 공항을 처음 이용한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단순한 편리함을 넘어서는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넓고 쾌적한 동선, 자연과 기술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 구성, 그리고 공항 전체가 마치 리조트처럼 설계돼 있다는 점에서 창이는 ‘지나치는 곳’이 아니라 ‘머물고 싶은 곳’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2025년 5월 14일, 로렌스 웡(Lawrence Wong) 싱가포르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창이 공항 제5 여객 터미널(T5) 착공식이 열렸다. 이는 창이 공항 역사상 가장 대규모 프로젝트이자 전략적인 확장 사업으로, 향후 수십 년 간의 항공 수요 급증과 글로벌 허브 공항 간의 경쟁 격화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조치다. 싱가포르 정부는 이를 도시 국가의 장기적 생존 전략이자 글로벌 경쟁력을 지속하기 위한 핵심 인프라로 보는 것이다.
창이 공항 T5는 연간 5천만 명의 승객을 추가로 수용할 수 있어, 공항 전체 연간 수용 능력은 1억 4천만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10.8㎢에 달하는 부지는 향후 위성 터미널을 추가할 수 있도록 설계됐으며, 여객 뿐 아니라 화물 운송, 연료 저장, 항공기 정비(MRO), 긴급 물류 기능까지 포괄하는 ‘차세대 메가 터미널’ 로 개발된다. 이는 창이 공항을 단순한 공항이 아닌, 싱가포르 산업 구조 전체를 뒷받침하는 중심축으로 확장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T5 프로젝트의 핵심은 자동화 기술과 인공지능의 접목이다. 자율 수하물 트랙터, 자율 주행차, 악천후에도 작동할 수 있는 수하물 로봇은 물론, 항공기 회항 시간 예측과 탑승 시점 최적화를 위한 AI 기반 영상 분석 시스템까지 적용된다. 이는 창이 공항이 미래형 공항 모델로 전환되는 중요한 전환점이며, 동시에 인구 고령화와 노동력 부족이라는 싱가포르의 구조적 문제를 기술로 극복하려는 도시 전략이 반영된 결과다.
창이 공항의 혁신은 공간 설계에서도 두드러진다. T5는 ‘싱가포르의 자연과 도시의 조화’를 설계 철학으로 삼았다. 곡선형 ‘잎사귀 지붕’은 대형 콘크리트 공항 공간을 보다 자연과 인간 친화적으로 만들고, 자연광과 녹지를 풍부하게 끌어들여 ‘공항 같은 공항’이 아닌 ‘살아 있는 도시형 공항’을 지향한다. 기존 터미널이 직선적 이동 중심이라면, T5는 머무르고 체험하는 복합 공간을 지향한다.
또한 T5는 지속가능성과 탄소중립 설계를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 창이 공항 그룹은 자체 태양광 발전, 스마트 에너지 관리 시스템, 고효율 냉난방 설비 등을 통해 탄소 배출을 최소화한 ‘그린 공항’으로의 전환을 추진 중이다. 기후 위기에 직면한 항공 산업에서 T5는 지속할 수 있는 공항 모델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덕분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 공항 산업이 위축됐던 상황에서도 창이 공항은 빠르게 회복세를 보이며 다시 정상 궤도에 올랐다. 2024년 승객 수는 약 6,770만 명으로, 팬데믹 이전 수준에 근접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체계적인 방역과 위기 대응 시스템, 그리고 유연한 시설 운영 능력 덕분이다. T5는 이러한 경험을 기반으로 보다 탄력적이고 회복력 있는 공항 운영 체계를 지향하고 있다.
이 같은 공간 전략과 서비스 철학은 국제적 평가로 이어지고 있다. 영국의 항공 서비스 평가 기관 스카이트랙스(Skytrax)가 2024년 8월부터 2025년 2월까지 전 세계 100여개 나라 575개 공항 여객을 대상으로 4월 9일 발표한 2025년 세계 공항 순위에서 창이 공항은 종합 1위를 기록했다. 창이는 출입국 절차, 식사, 쇼핑, 세면장, 청결, 고객 서비스 등 거의 모든 항목에서 최고점을 기록하며, 단순한 인프라 경쟁을 넘어선 사용자 경험 품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2024년 2위에서 정상에 복귀한 것으로, 통산 13번째 세계 1위 수상이다. 단발적 성과가 아닌, 장기적 운영 전략과 지속적 혁신의 결과다.
이번 평가에서 상위 5위 공항 중 4곳이 동아시아에 위치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도쿄 하네다 공항이 3위, 인천공항이 4위, 나리타 공항이 5위를 기록하며, 동아시아가 글로벌 항공 산업의 중심임을 다시금 입증했다. 그중에서도 우리 인천 국제공항은 창이 공항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꼽힌다. 2001년 개항한 인천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효율적인 동선, 첨단 자동화 시스템, 대규모 확장 가능 부지를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해왔다. 현재는 제3터미널과 제4활주로 건설이 한창이며, 연간 1억 명 수용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창이와 인천은 공항 운영의 철학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인천이 ‘빠르고 정확한 이동’과 기술 기반 효율성을 중시한다면, 창이는 ‘공간에서의 감성과 경험’을 앞세운다. 창이는 공항 체류 시간을 스트레스가 아닌 즐거움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세계 최초 공항 중 하나다. 이는 단순한 공간 설계가 아닌, ‘공항은 여행의 일부여야 한다’는 분명한 철학에서 비롯된 변화다.
오늘날 공항은 단순히 비행기를 타는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한 도시의 품격이며, 국가의 첫 인상이자 마지막 기억이다. 창이 공항은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자각했고, 가장 정교하게 구현해 낸 곳이다. T5의 착공은 단지 공간의 확장이 아니다. 이는 창이 공항이 공항의 정의를 다시 쓰겠다는 선언으로 보이며, 도시 국가 싱가포르의 미래 전략이자 생존 전략으로 연결된다. 기술, 공간, 경험, 지속 가능성까지 결합한 미래 공항의 새로운 기준을 창이 공항에서 보는 듯 하다. 모든 여행은 창이 공항에서 시작하거나, 창이 공항을 거쳐 갈 것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이성득 인도네시아 UNAS경영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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