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부터 김환기, 이우환까지…거장들이 눌러 쓴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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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이만, 총총: 미술인의 편지’
오는 26일부터 8월 8일까지
지금이야 ‘비디오 아트계의 조지 워싱턴’으로 불리지만, 57년 전 고국에서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 시절 백남준은 그저 일본 도쿄와 독일 뮌헨을 거쳐 미국 뉴욕에서 예술을 찾아 헤매는 이방인이었다. 누구나 금의환향을 꿈꿨을 그 시절, 고향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이 얼마나 기뻤을까. 이런 백남준의 심정은 그가 1968년 월간 <공간> 8월호에 실린 친필 원고 ‘뉴욕 단상’과 함께 동봉한 이 짧은 악필 편지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간’ 백남준을 알아가는 퍼즐 조각이 꼭 예술작품에만 있지는 않은 셈이다.
스마트폰 메시지로 몇 초 만에 감정을 전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예술가들은 수신인 하나를 위해 편지를 쓰고, 마음을 눌러 담고, 붓끝에 침묵을 얹었다. 서울 홍지동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오는 26일부터 열리는 기획전 ‘이만, 총총: 미술인의 편지’는 한국 현대미술의 열기가 들끓던 옛 시대의 잔향을 소환하는 전시다. 그림을 그리던 예술가들이 글을 통해 서로의 예술을 공유하고, 사상을 지지했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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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에선 작가들의 존경과 격려, 미안함, 고마움 등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1962년 김환기가 군 복무 중인 제자 신종섭에게 보낸 편지가 대표적이다. 유려한 필체로 ‘이병 신종섭 귀하’로 시작하는 편지엔 특유의 감수성 어린 김환기의 위로가 느껴진다. ‘군내에 여러 동지들이 있어 적적하지 않을 줄로 아나 예술의 꿈은 못 견디게 힘든 고독의 골목에 있을지도 모르겠네. 부디 명랑하고 아름다운 꿈을 잊지 마소. 자네들은 훌륭한 예술가가 될 것일세.’
이우환이 1969년 선배 예술가 이세득에게 쓴 편지는 정갈한 글자가 가로쓰기로 새겨져 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당시 이우환의 단색화 미학은 추상미술이 주류를 이루던 한국 화단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이세득은 주위의 비난 속에서도 이우환의 예술세계를 응원했고, 이우환 역시 꺾이지 않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 편지는 훗날 단색화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우환의 우직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밖에도 전시에선 한국화 거장인 월전 장우성이 서예가 원충희에게 보낸 편지, 서양화가 하인두가 시인 김규태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 등을 볼 수 있다. 김달진 관장은 “편지라는 아카이브를 통해 미술인의 삶에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며 “각자의 독특한 필체와 몰랐던 미술사적 사실을 만나는 중요한 지점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8월 8일까지.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