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트럼프 2기' 선물로 만들려면
“산업 현장에서 느끼는 ‘제조강국 코리아’의 생존기간은 길어야 5년이다. 도널드 트럼프 덕분에 이 기간이 조금 더 늘어날 여지가 생겼다. 트럼프가 안겨준 ‘선물 같은 4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렸다.”

굴지의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얘기를 듣는 순간 두 가지 포인트가 귀에 꽂혔다. 묘수가 나오지 않는 한 대한민국 제조업은 2030년 ‘소멸의 길’에 접어든다는 것, 그리고 ‘트럼프 2.0’ 시대는 한국 제조업에 재앙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이다.

중국에 밀려 패퇴할 운명이던 한국 제조업이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 봉쇄’ 정책 덕분에 시간을 벌게 됐다는 얘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여러 차례 관세 폭탄을 예고해 온 터. 모든 수입품에 10~20%, 멕시코와 캐나다 제품엔 25%, 중국산엔 60% 관세를 물리는 게 골자다. 이를 두고 한쪽에선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엔 엄청난 악재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다른 쪽에선 중국 관세가 훨씬 높은 만큼 반사이익을 누릴 기회라고 맞섰다.

한국경제신문 취재팀은 트럼프 2기에 한국 주력산업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점검하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미국 8개 도시에 터를 잡은 국내 기업을 취재해 지난주 ‘트럼프 2.0, K인더스트리 美 현장을 가다’란 기획 시리즈에 담았다. 현장을 둘러본 기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위기보다 기회로 생각하는 기업이 훨씬 많았다. 미국 기업들도 중국 공급망이 끊길 때 한국을 첫 번째 대안으로 꼽았다.”

미소를 짓는 건 트럼프 대통령이 러브콜을 보낸 조선업만이 아니었다. 중국의 위세에 눌려 지리멸렬하던 태양광 기업도 미국을 터전으로 재기의 꿈을 키우고 있다. 소형모듈원전(SMR) 시장의 선두주자인 테라파워의 크리스 레브스크 CEO는 현장을 찾은 본지 기자에게 “기술로 보나, 동맹관계로 보나 미국 원전산업에 한국만 한 파트너는 없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했단다. 보편관세와 전기차 보조금 폐지라는 ‘원투 펀치’에도 각각 하이브리드카와 에너지저장장치(ESS)라는 돌파구를 찾은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의 미국 산업 현장에선 희망을 읽었다. 미국에 생산기지가 없거나 내수시장만 바라보는 기업과는 상황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상당수 한국의 주력산업에 트럼프 2.0 시대는 악재가 아닌 게 분명했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트럼프 대통령이 벌어준 4년을 우리 기업의 근원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시간으로 만들지 못하면 결국 중국에 밀려 2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제조업으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이 어려운 일을 기업 홀로 하라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정부의 전폭적인 규제 완화와 재정 지원은 필수다.

현대차가 제아무리 자율주행에 힘을 쏟더라도 도시 전체가 ‘자율주행 실험실’인 중국 우한에서 10년째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는 바이두를 어떻게 당해내겠는가. 주 52시간 근무제에 갇혀 오후 6시면 모든 연구원이 ‘칼퇴’하는 삼성전자가 무슨 수로 ‘996’(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이 습관이 된 중국 테크기업의 추격을 막겠는가. 중국이 제조 대기업을 키우기 위해 막대한 보조금을 뿌려대는 상황에서 우리만 ‘잘 먹고 잘사는’ 대기업 지원에 인색한 건 또 어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 테니 싸워서 이겨라”고 해도 모자랄 판인데, 어쩐 일인지 우리 정부와 정치권은 다른 나라는 다 해주는 규제 완화와 재정 지원도 외면한다.

20일(현지시간) 트럼프 2.0 시대가 개막했다. 정부와 정치권이 윤석열 대통령 구속을 둘러싼 정쟁에 골몰하는 사이 트럼프가 벌어준 4년 중 하루가 허무하게 지나가고 있다. 이렇게 어영부영할 시간이 우리에게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