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새해엔 나이 좀 묻지 맙시다
설날 떡국을 받아 들고 또 같은 생각을 했다. ‘한 살 또 먹었구나.’ 한국인만은 유독 1년에 세 번 나이를 먹는 것 같다. 1월 1일에 한 번, 설에 한 번, 만 나이가 바뀌는 생일에 한 번. 앞 자리가 ‘4’로 바뀌는 해라 그런지 떡국을 뜨는 숟가락도 유독 무거웠다.

한국처럼 나이에 민감한 나라도 없다. 특파원으로 미국에 체류하던 시절엔 나이를 잊고 살았다. 정확히는 ‘이 나이엔 이래야 한다’는 암묵적 기준이 흐릿했고, 세대 간 대화가 자연스러웠다. 월가에 갓 취직한 20대 초중반 미국인 친구들은 기자와 반년 넘게 어울리는 동안 한 번도 나이를 묻지 않았다. 생일 파티에도 초대했는데, 한국인 동료가 ‘37’이라는 커다란 숫자 초를 꽂아 케이크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동네방네 광고할 일 있냐”고 소리친 기억이 난다. 지극히 한국인스러운 생각이었던 것 같아 지금도 쿡쿡 웃곤 하는 에피소드다.

혼자만의 생각일까 싶어 챗GPT를 열었다. ‘전 세계에서 나이 먹는 것을 가장 신경 쓰는 나라가 어디냐’고 묻자 ‘대한민국’이 가장 먼저 떴다. “한국은 외모와 나이에 민감한 문화로 잘 알려져 있다. 피부 관리, 성형외과, 안티에이징 산업이 매우 발달했으며 나이에 따른 사회적 기준이나 기대치도 강하게 작용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토요칼럼] 새해엔 나이 좀 묻지 맙시다
나이에 집착하는 문화가 우려스러운 건 국가적 자원이 비효율적으로 배분되고 이에 따른 부작용이 생기기 때문이다. 실력 있는 의사들이 필수 의료 대신 피부과·성형외과만 택하고 있다는 등의 이유만은 아니다. ‘적령기’라는 개념은 한국인의 시계열에서 평균적인 행동을 강요한다. ‘취업 적령기’ ‘결혼 적령기’ 등에서 해당 시점의 과제를 완수하지 않으면 ‘비정상’으로 간주된다. 자연히 그즈음의 모든 비용과 노력은 미션을 비교군과 비슷하게 ‘클리어’하는 데 투입될 수밖에 없다. 역설적으로 또래만큼 ‘성취’를 이루지 못한 젊은 층이 결혼이나 출산을 포기하고 스스로 고립을 택하는 이유기도 하다. 자신의 나이에 ‘응당’ 갖춰야 할 조건을 맞추지 못했다는 판단이 포기를 부르는 것이다.

연령 구분 없는 자연스러운 대화의 장도 다른 나라에 비해 확연히 적다. 요즘은 온·오프라인에서 성행하는 취미 모임이나 소그룹 여행 상품조차도 나이 제한을 둔다.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선 30대 초중반이 ‘화석’ 취급을 당한다. 또래가 아니면 마음을 터놓고 생각을 나눌 공간을 찾기 힘들다. 이런 환경에선 정치적 담론이 연령대별로 더욱 고착화되고, 세대 갈등도 심해진다. 선거 때마다 젊은 층과 노년층은 조금의 대화 노력도 없이 서로를 외면하기 일쑤다.

이 같은 양상을 제도적으로 해결하기는 이미 어려운 수준이다. 2023년 법적으로 만 나이를 도입했음에도 ‘만 나이 기준인지’ ‘몇 년생인지’ 물어가며 끊임없이 ‘진짜 나이’를 확인하려는 습성이 한국인 DNA에 뿌리내린 탓이다. 나이가 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그 잣대를 타인에게 적용하는 ‘확인 작업’을 거치고 난 뒤에서야 안도감을 느끼는 아이러니랄까.

최근 개봉한 영화 ‘서브스턴스’는 한때 잘나간 할리우드 배우가 과거 영광을 잊지 못하고 신물질의 힘을 빌려 두 개의 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세포 분열로 태어난 ‘젊은 몸’의 새 삶을 통해 나이와 외모 강박이 주는 병폐를 살벌하게 그려낸다. 그런데 원작보다 이를 패러디한 한국 유튜브 영상이 더욱 기괴했다. 30세 몸으로 깨어나 매끈해진 육체에 눈이 반짝이던 것도 잠시, 일행이 칼날 같은 말을 쏟아낸다. “우리 이제 ‘계란 한 판’이야.” “20대랑 달라. 체력이 안 돼 아무것도 못 해.” 스물다섯 끝자락에서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래. 25까지는 없어서 난리지만 26부터는 아무도 안 찾는대”라는 ‘개똥 철학’에 설파당했던 기억이 문득 스쳤다.

‘셀프 후려치기’에 익숙해져버린 한국인에게 음력 새해를 맞아 하고 싶은 당부가 있다. 새해 벽두부터 거울을 보고 한숨 먼저 쉬지 않았으면, 상대가 궁금하면 나이를 묻기 전에 먼저 말을 걸어봤으면,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냥 우선 해봤으면.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면 세상엔 할 수 있는 일도, 대화를 나눌 사람도 너무 많다. 아마 한국 사회의 행복지수도 배는 높아지지 않을까. ‘불혹(不惑)’에 세상일에 흔들리고, ‘지천명(知天命)’에 하늘의 뜻을 모르면 좀 어떤가. 부디, 새해엔 제발 나이 좀 묻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