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is was on Saint Valentine’s day
When every bird comes there to choose his mate

성 밸런타인데이 날이었다
그날 모든 새가 거기로 와 자기 짝을 찾는다네"

-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3~1400)의 시 <새들의 의회(Parlement of Foules)> 中

중세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 불리며 중세 영어의 정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설화집 <캔터베리 이야기>를 쓴 제프리 초서. 그가 1382년경에 완성한 시 <새들의 의회>는 오늘날 우리가 2월 14일을 사랑을 속삭이는 날로 기억하게 만든 신호탄이었다. 700행으로 이뤄진 이 시에서는 모든 새들이 각각 자신의 짝을 찾으려고 신전 앞에 모여 토론을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바로 그날이 2월 14일 성 밸런타인 축일이었기 때문이다.
초콜릿 퐁뒤(fondu).
초콜릿 퐁뒤(fondu).
초서의 이 시가 나온 이후 밸런타인데이는 문학작품에서 종종 사랑의 날, 연애의 날로 언급됐다. 1840년대에 영국의 한 초콜릿 회사가 밸런타인데이 선물용 초콜릿을 출시하면서 이날 초콜릿을 주고 받는 풍습이 생겼다. 여성이 먼저 사랑을 고백하면서 초콜릿을 주는 문화는 1950년대 이후 일본의 제과업계들이 여성해방운동을 마케팅으로 활용하면서 정착됐다. 이래저래 2월은 달콤한 달이다. 어떤 면에서는 2월이야말로 진정한 한 해를 시작하는 달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동안의 ‘썸’을 이 초콜릿으로 끝내고 공식적인 연인으로서의 사랑을 시작하려는 달, 겨울이 물러날 기세를 보이고 봄이 오려고 움찔거리는 달,
제프리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를 1400년경 채식한 필사본 '엘즈미어 초서(Ellesmere Chaucer)' / ⓒ헌팅턴 라이브러리
제프리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를 1400년경 채식한 필사본 '엘즈미어 초서(Ellesmere Chaucer)' / ⓒ헌팅턴 라이브러리
발레계에서 2월은 10대 발레무용수들의 시작점이 되는 달이다. 해마다 2월이면 전 세계 10대 무용학도들이 로잔콩쿠르(Prix de Lausanne)를 치르기 위해 스위스 로잔으로 몰려든다. 1972년에 시작된 이래 권위 있는 국제 콩쿠르로 자리 잡아 세계 무대에 자신을 알리고 유수 발레단에 입단할 수 있는 관문이 된다. 이 콩쿠르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인재들은 전 세계 어디든 자신이 원하는 발레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와 경비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로잔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이후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 사례로 우리나라의 강수진, 박세은 무용수를 꼽을 수 있다.

밸런타인데이의 초콜릿, 스위스와 발레로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면 발레의 동작 중에 퐁뒤(fondu)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퐁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단어가 아닌가? 그렇다. 치즈와 와인을 섞여 녹이거나 초콜릿을 녹여서 고기와 채소를 푹 담아서 찍어 먹는 스위스의 대표 요리이다. '녹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퐁드르(fondre)’에서 유래한 말로, 스위스 서부 프랑스어권 지역과 프랑스 사부아 지방에서 주로 먹는 음식이라 프랑스어인 ‘퐁뒤’로 불리게 됐다. 스위스나 프랑스의 치즈는 쿰쿰한 특유의 향이 강해 현지 퐁뒤는 우리나라 사람들 입맛에 잘 맞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주식이 아니라 디저트인 초콜릿 퐁뒤를 오히려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24년 로잔콩쿠르 현장 / 사진. ⓒprix de lausanne
2024년 로잔콩쿠르 현장 / 사진. ⓒprix de lausanne
1985년 로잔콩쿠르에서 스칼라십을 받은 강수진, 2007년 그랑프리를 받은 박세은. / 사진출처. 한경DB
1985년 로잔콩쿠르에서 스칼라십을 받은 강수진, 2007년 그랑프리를 받은 박세은. / 사진출처. 한경DB
발레의 동작 ‘퐁뒤’도 치즈나 초콜릿에 녹아 들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끈적하게 수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무릎을 구부려서 드미플리에 하며 내려가되 한 다리는 바닥에 그대로 붙어서 지지하고, 다른 다리는 공중에서 움직인다. 보통 움직이는 다리의 발끝을 지지하는 다리의 발목 높이까지만 내린 후 다시 두 다리의 무릎을 펴고 몸을 세우는 동작을 기본으로 연습한다. 이때 움직이는 다리는 몸의 앞, 옆, 뒤로 뻗을 수 있고 이 경우에는 바트망 퐁뒤(battment fondu)라고 부른다.

이 동작을 할 때 꼭 지켜야 할 몇 가지가 있다. 내려가는 움직임에서도 호흡을 밑으로 완전히 꺼트리지 않고 다시 위로 끌어올릴 수 있게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턴 아웃한 몸이 앞뒤로 찌그러지거나 빠지지 않도록 움직이는 동안에는 정확하게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즉, 퐁뒤에서는 무게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잡는 게 핵심적인 훈련 내용이다.

퐁뒤를 익힐 때 처음에는 바를 잡고 연습하지만, 점차 센터에서 바 없이 연습하면서 자신의 무게중심을 정확히 이해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훈련한다. 작품이나 안무에서 퐁뒤가 단독으로 쓰이는 경우보다 바트망 퐁뒤처럼 다른 동작과 연결해서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젤>의 2막에서 윌리들이 선보이는 유명한 군무 중 하나가 지탱하는 다리는 구부려서 내려가고, 움직이는 다리는 아라베스크를 해서 무대를 가로지르며 가는 장면이다. 이 동작을 아라베스크 퐁뒤(arabesque fondu)라고 부른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1막 라일락 요정의 독무에서는 시손느 퐁뒤(sissonne fondu)가 등장한다. 시손느는 두 다리가 함께 공중으로 도약하는 동작을 뜻한다. 전자의 퐁뒤가 고혹적이라면 후자의 퐁뒤는 위엄이 느껴진다. 그리고 두 작품 속 캐릭터들이 모두 영혼과 요정이라는 비현실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의 퐁뒤는 환상을 자아낸다.
<지젤> 2막. 윌리들의 아라베스크 퐁뒤 장면. / 사진. ⓒJack Devant/Estonian National Opera
<지젤> 2막. 윌리들의 아라베스크 퐁뒤 장면. / 사진. ⓒJack Devant/Estonian National Opera
밸런타인데이와 발레의 공통점 '퐁뒤'
<잠자는 숲속의 미녀> 1막에서 라일락 요정(Olga Skripchenko의 춤). / 사진. ⓒJack Devant/National Opera of Ukraine
<잠자는 숲속의 미녀> 1막에서 라일락 요정(Olga Skripchenko의 춤). / 사진. ⓒJack Devant/National Opera of Ukraine
사랑은 그것이 현실이 되기 전까지는 환상을 품게 만든다. 조심스럽게 초콜릿과 감정을 품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 그리고 초콜릿을 건네기 직전이 그 환상의 정점이 아닐까 싶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동작이 퐁뒤라고 생각한다.

클래스에서 퐁뒤를 할 때 발레 교사들은 이 점을 강조한다. 동작이 끊어지지 않게 끈적하게 움직이라고. 퐁뒤를 할 때에는 초콜릿의 달콤함과 사랑의 설렘에 푹 빠지듯 몸을 그 안에 빠트리고 누구보다 끈적하고 끈끈하게 그 관계와 감정에 밀착하지만, 푹 빠진 그 순간에 매몰되면 그대로 함께 침몰한다. 그 사랑이 현실에서 아름답게 유지되려면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걸 사랑을 잃은 후에 배우게 된다.

퐁뒤에서 끈적하게 깊게 땅을 향해 내려가는 그 순간이야말로 나의 무게중심을 가장 단단히 지켜야 하는 시간인 것처럼 사랑도 그렇다. 음악에, 춤에, 사랑에, 올해 2월은 그 안에 푹 빠졌다가 다시 나를 세우고 다시 빠지기를 반복하며, 초콜릿처럼 끈적하고 달콤하게 지내면 어떨까 싶다. 인생은 짧고 마침 2월도 1년 중 가장 짧다.

이단비 작가·<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