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런타인데이와 발레의 공통점 '퐁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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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단비의 발레의 열두 달
'녹다'라는 뜻의 발레 동작 퐁뒤
끈적하게 동작 수행하기 위해
무게중심 정확히 잡는 게 특징
<지젤>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잘 나타나
'녹다'라는 뜻의 발레 동작 퐁뒤
끈적하게 동작 수행하기 위해
무게중심 정확히 잡는 게 특징
<지젤>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잘 나타나
"For this was on Saint Valentine’s day
When every bird comes there to choose his mate
성 밸런타인데이 날이었다
그날 모든 새가 거기로 와 자기 짝을 찾는다네"
-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3~1400)의 시 <새들의 의회(Parlement of Foules)> 中
중세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 불리며 중세 영어의 정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설화집 <캔터베리 이야기>를 쓴 제프리 초서. 그가 1382년경에 완성한 시 <새들의 의회>는 오늘날 우리가 2월 14일을 사랑을 속삭이는 날로 기억하게 만든 신호탄이었다. 700행으로 이뤄진 이 시에서는 모든 새들이 각각 자신의 짝을 찾으려고 신전 앞에 모여 토론을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바로 그날이 2월 14일 성 밸런타인 축일이었기 때문이다.


밸런타인데이의 초콜릿, 스위스와 발레로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면 발레의 동작 중에 퐁뒤(fondu)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퐁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단어가 아닌가? 그렇다. 치즈와 와인을 섞여 녹이거나 초콜릿을 녹여서 고기와 채소를 푹 담아서 찍어 먹는 스위스의 대표 요리이다. '녹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퐁드르(fondre)’에서 유래한 말로, 스위스 서부 프랑스어권 지역과 프랑스 사부아 지방에서 주로 먹는 음식이라 프랑스어인 ‘퐁뒤’로 불리게 됐다. 스위스나 프랑스의 치즈는 쿰쿰한 특유의 향이 강해 현지 퐁뒤는 우리나라 사람들 입맛에 잘 맞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주식이 아니라 디저트인 초콜릿 퐁뒤를 오히려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동작을 할 때 꼭 지켜야 할 몇 가지가 있다. 내려가는 움직임에서도 호흡을 밑으로 완전히 꺼트리지 않고 다시 위로 끌어올릴 수 있게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턴 아웃한 몸이 앞뒤로 찌그러지거나 빠지지 않도록 움직이는 동안에는 정확하게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즉, 퐁뒤에서는 무게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잡는 게 핵심적인 훈련 내용이다.
퐁뒤를 익힐 때 처음에는 바를 잡고 연습하지만, 점차 센터에서 바 없이 연습하면서 자신의 무게중심을 정확히 이해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훈련한다. 작품이나 안무에서 퐁뒤가 단독으로 쓰이는 경우보다 바트망 퐁뒤처럼 다른 동작과 연결해서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젤>의 2막에서 윌리들이 선보이는 유명한 군무 중 하나가 지탱하는 다리는 구부려서 내려가고, 움직이는 다리는 아라베스크를 해서 무대를 가로지르며 가는 장면이다. 이 동작을 아라베스크 퐁뒤(arabesque fondu)라고 부른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1막 라일락 요정의 독무에서는 시손느 퐁뒤(sissonne fondu)가 등장한다. 시손느는 두 다리가 함께 공중으로 도약하는 동작을 뜻한다. 전자의 퐁뒤가 고혹적이라면 후자의 퐁뒤는 위엄이 느껴진다. 그리고 두 작품 속 캐릭터들이 모두 영혼과 요정이라는 비현실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의 퐁뒤는 환상을 자아낸다.



클래스에서 퐁뒤를 할 때 발레 교사들은 이 점을 강조한다. 동작이 끊어지지 않게 끈적하게 움직이라고. 퐁뒤를 할 때에는 초콜릿의 달콤함과 사랑의 설렘에 푹 빠지듯 몸을 그 안에 빠트리고 누구보다 끈적하고 끈끈하게 그 관계와 감정에 밀착하지만, 푹 빠진 그 순간에 매몰되면 그대로 함께 침몰한다. 그 사랑이 현실에서 아름답게 유지되려면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걸 사랑을 잃은 후에 배우게 된다.
퐁뒤에서 끈적하게 깊게 땅을 향해 내려가는 그 순간이야말로 나의 무게중심을 가장 단단히 지켜야 하는 시간인 것처럼 사랑도 그렇다. 음악에, 춤에, 사랑에, 올해 2월은 그 안에 푹 빠졌다가 다시 나를 세우고 다시 빠지기를 반복하며, 초콜릿처럼 끈적하고 달콤하게 지내면 어떨까 싶다. 인생은 짧고 마침 2월도 1년 중 가장 짧다.
이단비 작가·<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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