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의 크리스마스>(1983)를 논하기에는 조금 늦은 계절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점령한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포로수용소, 모두가 뙤약볕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이 며칠간의 이야기는 시기를 불문하고 항상 통역과 교통(交通)의 불가능성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사이를 뚫고 나오고야 마는 구원의 기적적인 가능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내러티브의 주축이 되는 것은 네 사람이다. 일본군 요노이 대위(류이치 사카모토 扮)와 하라 군조(기타노 다케시 扮), 그리고 영국군 포로인 존 로렌스 중령(톰 콘티 扮)과 잭 셀리어스 소령(데이비드 보위 扮)이다. 요노이가 영어를, 로렌스가 일본어를 할 줄 안다고는 하나 이들 사이에는 필연적인 불통이 존재한다. 언어와 관습, 그리고 내재화된 사고의 차이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진훈(戦陣訓)을 떠받드는 하라에게 있어서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로렌스는 불명예스러운 군인이다.

하라는 포로들 중 유일하게 일본어를 할 줄 아는 로렌스와 환담을 하면서, 친근한 말투로 자살할 것을 권하기도 한다. 영화는 통역의 어려움을 강조하는 사례 중 하나로 요노이에게 ‘기관총 잭’이라는 별명의 의미를 제대로 통역해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 로렌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똑같이 영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국인인 로렌스가 일본인인 요노이에게 이해시키기 힘든 영역의 속어다. 그리고 포로들의 부대장 헉슬리(잭 톰슨 扮)가 있다. 그는 애초에 번역의 시도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으로, 통번역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층위에서 움직이는 존재다.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 사진출처. IMDb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 사진출처. IMDb
잭 셀리어스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군사재판 장면에서도 통역 행위가 벌어지지만, 통역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이름을 대라는 기본적인 절차에서조차 통역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때 처음 잭을 보게 된 요노이의 반응은 심상치 않다. 잭을 향한 요노이의 심취는 서정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스코어와 서서히 당겨지는 줌인, 눈을 깜빡이고 입술을 축이는 명백한 동요의 표정으로 포착된다.

이 심취는 같은 언어를 나누는 이들끼리의 친밀감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비록 요노이가 셀리어스에게 건네는 첫인사는 영어로 된 <햄릿>의 가장 유명한 구절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그걸 통해 대위는 자신의 언어능력과 계급성, 그리고 셀리어스를 향한 호의를 넌지시 내비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층위에 성적 끌림이 포함되어 있는지 없는지 또한 관객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극중 인물 대부분은 잭에 대한 요노이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성적 관심으로 해석하는데, 그 또한 섣부른 번역이라 보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나는 지금 <전장의 크리스마스>를 퀴어 영화로 독해해온 전통적인 해석의 판본을 반박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가 반복하고 있는 통역과 통역 불가능성의 코드 아래에서는 잭에 대한 요노이의 심취 또한 ‘번역될 수 없는 어떤 것’이고, 그 자신조차 납득할 수 없는 심취가 원칙과 품위를 지키는 이성적인 젊은 장교였던 요노이를 와해시켰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많은 사람이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나타난 호모 에로틱 코드에 집중했다. 인종만 다를 뿐 젊고 미남인 두 남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그 무언가는 사랑밖엔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러나 심취의 현상을 기술하기 위해서 에로스의 언어에만 기대는 것이 과연 적확한 번역일까?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 잭 셀리어스는 요노이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진 마신과도 같다. 비단 요노이에게뿐일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행을 일삼는 셀리어스의 행위를 번역할 수 있는 단서는 그가 독방에 고립된 단 두 개의 씬에서 주어진다.

첫 번째 씬에서 셀리어스는 면도를 하고 차를 마시며 일상적인 대화를 수행하는 마임을 보여주고, 두 번째 씬에서는 건너편 독방에 로렌스를 둔 채 자신을 전장까지 오게 만든 계기에 대해서, 동생이 집단 괴롭힘을 당하도록 방조했던 과거에 대해서 들려준다. 죽음을 앞둔 잭의 마임은 그를 데리러 온 일본 군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 사진출처. IMDb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 사진출처. IMDb
어리둥절한 것은 우리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삶에서 멀어진 그가 군인으로서 길들여진 타성을 일상의 세계로 되돌려놓음으로써 지금 이 현실을 벗어나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결국 간절히 삶을 원하는 것인가?

반면, 동생과의 일화를 회상하는 잭 셀리어스는 보다 명확한 언어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다. 고해의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왜 삶 밖으로 도망가려고 하는가?’ 신체장애인인 남동생을 무수히 많은 폭력적인 눈과 손 사이에 방치한 이후로 잭은 삶의 진정한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고 정말로 의미 있는 일들, 말하자면 ‘제 손으로 밭을 갈아 결실을 얻는 일’에서 스스로를 배제하게 된다.

전쟁은 잭에게 일종의 구원이자 도피처였고, 잭은 동료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몸을 던지기 시작한다. 자기 파괴행위로도 번역되는 잭의 기행은 관망과 관조로부터 벗어나 삶으로, 정확히 말하면 죽음과도 등을 맞대고 있는 위태로운 삶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 혹은 속죄의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한편 로렌스의 꿈 이야기는 통역사로서 양측 모두에게 늘 어느 정도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내재된 태도, 즉 ‘우리 모두는 틀렸다(적확한 번역이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를 설명하는 실마리로 제공된다. 꿈속의 여자는 그의 내면의 억압된 아니마(Anima)로, 로렌스가 매일같이 마주하는 번역 불가능성이라는 장벽을, 심리 기저에 깔린 절망을 질문으로 되돌려준다.

번역이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실이란 존재하는가? 번역이란 이해 불가능한 것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과정이지만 본질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로렌스의 아니마는 번역 바깥에 있는 진실을 말해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한다. 일본군과 포로들 사이를 종횡하면서 통역에 힘썼다가 억울하게 사형당할 신세가 된 로렌스는 도망쳐도 도망칠 수 없었던 꿈속 아니마의 질문에, 필연과도 같은 실패와 목전에 닥친 죽음 앞에 좌절하고야 만다.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바로 다음 순간, 우리는 영화를 통틀어 가장 불가능한 기적을 목도하게 된다. 하라가 잭과 로렌스의 ‘파더 크리스마스’가 되어 생명이라는 선물을 베푼 것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영어도, 산타클로스도, 크리스마스도 잘 모르는 하라가 자바섬의 포로수용소에서는 다소 낯설게 들리는 이, 어설픈 크리스마스 인사를 건네며 두 사람의 목숨을 실질적으로 구해낸다.

인사는 4년 후 재회한 하라와 로렌스 사이에서 똑같이 되풀이된다. 그전에 우리는 또 다른 영문 모를 인사를 목격한 뒤다. 무고한 헉슬리를 죽이려는 요노이를 가만두고 볼 수 없었던 잭 셀리어스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거침없이 나아갔고, 대위의 팔을 잡은 채 양 뺨에 키스한 것이다.

서양식 인사이기도 한 이 행위는 요노이에게는 번역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최초의 대면이자 접촉이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낯선 것’으로부터 건너온 인사. 그 인사를 건넨 대가로 잭은 생을 마감하게 되지만, 그 이상의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모래 구덩이에 목까지 파묻힌 채 잭 셀리어스는 구원을 맞이한다. 적어도 그 자신에게서는.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하라와 로렌스는 다시 마주 앉아있다. 그들은 짧게 잭과 요노이를 추억한다. 종전 이후 사형당하기 직전, 요노이는 로렌스에게 잭의 유품인 머리카락을 전해주면서 자신의 고향 신사에 바쳐달라고 부탁했다. 잭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본군인인 요노이의 방식으로 남길 수 있는 최고의 예우인 셈이다. 잭의 인사는 요노이에게 도착했고, 하라의 인사는 로렌스에게 도착했으며, 요노이의 인사는 로렌스를 매개로 잭에게 도착했다.

뿌린 씨앗이 곡식이 되듯 연쇄적으로 도착한 인사가 언어로부터 해방된 순간, 카메라 또한 초월적인 위치로 이동하여 하라와 로렌스를 버드아이 앵글의 풀 샷으로 담아낸다. 그 순간만큼은 통역도, 통역의 불가능성도 작동하지 않는다. 취기를 빌미로 그 자신에게는 낯설었을 서양 명절의 정신을 실천한 하라는 비록 본인의 목숨을 구할 수는 없었을지라도 말과 개념을 뛰어넘는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그는 몇 시간 후 죽게 될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환히 웃으며 그때처럼 인사를 던질 수 있다. 계절을 뛰어넘어 잊히지 않을 고별과 안부의 인사를.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커뮤니케이션은 계속해서 실패하고 미끄러진다. 세계와 질서, 상식과 균형으로부터 인간을 밀어내는 척력이 있다면 한편에는 인력 또한 존재한다. 번역은 항상 좌절된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끝내 도착하고야 만다. 그리고 항상 자기만의 방식으로 인사를 건넨다.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메인 예고편]
이태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