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10년의 세월이 주는 위력을 가늠하게 하는 말이다. 데카(deca), 10년을 뜻하는 말과, 당스(dance), 춤을 뜻하는 말이 만나서, 안무가 오하드 나하린(Ohad Naharin, 1952~)의 예술적 자취가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했다. 10년의 위력을 담은 <데카당스>는 서울시발레단과 함께 이번 시즌의 문을 힘차게 여는 열쇠가 되었다. 컨템퍼러리발레를 지향하는 공공발레단의 정체성과 방향의 키가 이제 <가나가와 해변의 거대한 파도> 속 거칠고 날카로운 물살을 헤치고 제 항로에 접어들고 있다. <데카당스>는 그런 긍정의 신호를 보여준 공연이기도 했다.
잊어라, 깨워라, 춤을 춰라! 몸과 감각의 문을 연 10년의 춤
춤으로 부르는 고향의 노래 "쉐바스하마임 우바아레츠!”

<데카당스>는 오하드 나하린의 안무작 8편 중에서 하나씩 그 조각들을 모아서 또 하나의 레퍼토리로 만든 작품이다. 공연 전반부부터 강렬하다. 반원형의 형태로 배치한 의자에서 검정 재킷과 흰색 셔츠를 입은 무용수들이 역동적인 움직임을 선보이는 장면은 그의 시그니처나 다름없다. 이때 무용수들은 다같이 "쉐바스하마임 우바아레츠(Shebashamaim Uva'aretz)"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쏟아내며 노래를 한다. 히브리어로 ‘하늘과 땅에’라는 뜻이다. 왜 이 말을 무대 위에서 외치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오하드 나하린의 고향이 이스라엘이란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인이 유월절에 부르는 노래 ‘에하드 미 요데아(Echad Mi Yodea)’의 한 부분이다. ‘에하드 미 요데아’는 ‘누가 하나(님)를 아는가?’라는 뜻을 갖고 있다. 오하드 나하린은 어릴 때부터 읽고 불렀던 고향의 노래를 자신의 작품 안에 넣은 것이다.

발레 공연을 종종 봐왔던 관객이라면 이번 공연에서 또 한 가지 의아한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몇 차례 공연됐던 <마이너스 7>과 이 장면이 똑같기 때문이다. 이번 <데카당스>가 그렇듯이 <마이너스 7>도 오하드 나하린이 자신의 작품에서 몇 가지 부분을 발췌해서 구성했던 작품이었다. 발췌 작품과 구성에 변화를 주면서 조금씩 다른 작품으로 재탄생됐고, 그에 따라 이름도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이너스 7>이 공연됐지만 해외에서는 <마이너스 16>이 종종 공연되기도 한다. 이 작품들에는 그의 예술적 동지이기도 했던 첫 번째 아내와 살아 생전 함께 작업했던 흔적이 있어서, 아내를 향한 추모와 추억이 작품 안에 담겨 있기도 하다. 예술이 사람을 담지 않으면, 춤이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번 공연은 컨템퍼러리하고 현대적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전통과 민속적 색채가 짙고, 안무가가 속한 사회의 역사와 안무가 개인의 역사가 들어있는 것이다.

모든 감각을 깨우며 세상을 향해 문을 여는 가가(Gaga)

특히 안무가 오하드 나하린의 작품을 즐기기 위해서는 그의 움직임 언어이자 춤 언어인 ‘가가(Gaga)’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가 클래스에 참여했던 경험을 통해 이야기하자면, 가가는 모든 감각을 깨우는 작업이다. 거울이 없거나 거울을 가린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면서 시각에 많은 비중을 두지 않고 내 몸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과 감각을 골고루, 충분하게 느끼고 사용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공기가 살갗에 닿는 감각에도 집중하게 한다. 내 몸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을 하나씩 느끼고 움직이고, 이 모든 것을 통합해 내는 작업을 한다. 이번 <데카당스>를 준비하면서 무용수들은 일주일 세 번 이상 가가로 훈련했다고 한다. 발레 클래스가 균형있고 확장된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고 몸을 콘트롤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시킨다면, 가가는 몸과 감각이 세상을 향해 완전히 열리도록 만든다. <데카당스>는 다양한 장르의 춤 안에 즉흥적 요소와 폭발적인 에너지, 춤을 즐기는 태도를 녹여낸 작품이기 때문에 발레 클래스와 가가를 통해 훈련한 효과는 무용수의 몸을 관통하며 그대로 무대 위에서 쏟아져 나왔다.
잊어라, 깨워라, 춤을 춰라! 몸과 감각의 문을 연 10년의 춤
이 맥락에서 본공연이 시작되기 30분 전부터 무대 위에 한 명의 무용수가 펼치는 사전 퍼포먼스는 의미 있다. 이 사전 퍼포먼스 안에 가가의 언어와 오하드 나하린의 춤에 대한 사유가 녹아있기 때문에 공연을 어떻게 보면 좋을지 관객들에게 사전에 알려주는 일종의 안내서와 같다.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관객의 감각을 열어놓는 시간인 것이다.

무대와 객석을 잇는 관객의 춤

즐긴다는 말을 굳이 강조한 점에 대해서는 이 작품을 본 관객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 공연에서 무용수와 관객은 분리된 무대와 객석에 위치하거나 서로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다. 우선 무용수가 한 명씩 나와 자기 춤을 추면서 자기고백적 현장을 만드는 장면을 통해 그 경계의 결계를 풀었다. 어떤 무용수는 무용수로서 자신의 신체조건에 아쉬움을 토로하고, 어떤 무용수들은 동성 부부로 살아가는 일상과 사랑을 ‘제법 맛있게 잘 끓이는 미역국’을 통해 이야기한다. 볼쇼이발레단 출신의 어머니에게 자신의 춤을 보여주기를 꺼려했던 무용수는 용기 내어 어머니를 공연에 초대했던 기억을 꺼내놓고, 가족과 남자친구가 각기 다른 국적을 가지고 있는 한 무용수는 그럼에도 자신은 한국인이고 한국이 좋다며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에 쐐기를 박는다. 부모님이 각각 체조선수와 시인인 무용수는 그 둘의 유전자가 자신의 몸에서 춤으로 화한 것을 이야기한다. 무용수는 속내를 털어놓고, 관객은 그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저쪽과 이쪽의 세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잊어라, 깨워라, 춤을 춰라! 몸과 감각의 문을 연 10년의 춤
객석과 무대를 잇는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관객들을 모두 일으켜 세운 무용수는 여러 가지 조건을 말하며 최종적으로 무대 위에 올릴 한 명의 관객을 물색해 낸다. 위트있는 다양한 조건을 통과하고 무대에 오른 관객은 무용수들과 즉흥적으로 그 장면을 완성시키며 박수 세례를 받았다. 무용수들이 아예 객석으로 내려와 한 명씩 파트너가 될 관객을 관객을 데리고 올라와 다같이 춤을 추는 장면은 하이라이트였다. 마지막까지 무대에 남은 관객은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이 상황을 이끌고 즐기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관객이 추는 ‘막춤’은 ‘막춤’이 아니라 이 춤을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춤’으로 남았다.

“잊으세요, 당신이 아는 모든 걸.” 공연이 시작할 때 무대 위에는 이 내레이션이 몇 차례 흘러나왔다. 가가에 대해서 모른다고 해도, 무대 위의 저 움직임이 어떤 춤을 기반으로 나온 건지 구분해 낼 안목이 없더라도 문제는 없다. 이 당부처럼 ‘모든 것을 잊고’ 춤의 향연 안에 빠져들 준비만 하면 된다. 나의 몸이 어떤 상태이든, 늙든 젊든, 장애가 있든 없든, 병들었든 아니든, 굳었든 아니든, 지금 내게 있는 그 감각을 깨워서 춤 안에 들어가면 된다. 그것이 가가의 언어가 가고자 하는 지점이며, 이 작품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잊으세요,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을. 깨우세요, 당신의 몸과 감각을. 그리고 춤을 추세요!’

이단비 무용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