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르가 자신의 배우자인 알린 샤리고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목탄화. ©Heidi Markow
르누아르가 자신의 배우자인 알린 샤리고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목탄화. ©Heidi Markow
유명 화가가 그린 작품이 모두 비싼 것은 아니다. 어떤 그림엔 ‘잃어버린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수집가의 창고 구석에 오랜 세월 먼지로 뒤덮여 있거나, 몇 차례 손바뀜 과정에서 분실될 경우 작품은 미술사에서 지워진다. 물론 작품 본연의 가치까지 잃는 건 아니다. 수집가들이 유명 갤러리나 메이저 경매뿐 아니라 지역 소규모 경매장부터 벼룩시장, 골동품 상점까지 찾는 이유다. 헐값에 나온 작품이 알고 보니 오래전 자취를 감췄거나, 혹은 한 번도 발견된 적 없던 ‘잭폿’인 경우가 종종 있어서다.

최근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시골 동네에서 이런 잭폿이 터졌다. 30일 아트뉴스 등 해외 미술전문매체에 따르면 지난 1월 필라델피아 몽고메리 카운티에서 열린 작은 경매에서 프랑스 유명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회화 한 점이 낙찰됐다. 가로 44.5㎝, 세로 41.9㎝ 크기의 목탄화인 이 그림의 낙찰자는 지역에서 골동품점을 운영하는 하이디 마코우. 그가 내건 입찰가는 단돈 12달러(약 1만8000원)에 불과했다.
프레데리크 바지유가 그린 '르누아르의 초상'(1867), 파브르 미술관 소장.
프레데리크 바지유가 그린 '르누아르의 초상'(1867), 파브르 미술관 소장.
“어딘가 특별해”…‘안목감정’ 통했다

미술품 감정은 소유 이력이나 거래자료, 재료 분석 등 객관적인 데이터를 중심으로 이뤄지지만, 이보다 앞서 판단 근거로 쓰이는 게 안목 감정이다. 오랜 경력을 지닌 화상(畵商)이나 비평가 등 전문 감정가의 연륜과 경험, 직관을 따르는 감정이다. 특히 한 작가나 특정 사조만 다룬 감정가의 경우 작품 속에서 작가의 사소한 습관부터 특유의 스타일을 알아채며 진품을 가리거나 가격을 매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마코우 역시 직관을 따랐다. 골동품상을 운영하며 다양한 작품들을 다뤄본 만큼, 나름의 안목 감정을 한 셈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정확히 어떤 작품인지 알 수 없었다”면서도 “어딘가 특별하다고 느껴졌다”고 밝혔다. 이후 찾아낸 특별한 느낌의 구체적인 근거는 이렇다. 그림을 감싼 액자의 품질이 고급스러웠고, 사용된 종이나 희미하게 남아있는 서명을 통해 르누아르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액자 뒷면엔 미국의 미술 수집가이자 큐레이터였던 루이스 마데이라에게 판매됐다는 도장도 찍혀 있었다.
한국경제신문과 우스터미술관이 주최하는 인상파 특별전 '모네에서 미국으로: 빛, 바다를 건너다'전시가 15일 개막했다. 르누아르 <아랍 여인>./2025.2.15 임형택기자
한국경제신문과 우스터미술관이 주최하는 인상파 특별전 '모네에서 미국으로: 빛, 바다를 건너다'전시가 15일 개막했다. 르누아르 <아랍 여인>./2025.2.15 임형택기자
액자에서 드러난 르누아르 흔적

액자에 주목한 마코우의 안목은 인상파에 대한 이해가 깔린 대목이다. 실제로 인상주의를 탄생시킨 거장들은 풍부한 패턴의 금박을 입히거나 계단식으로 조각한 프레임의 액자를 활용했다. 인상파가 갓 태동한 당시만 해도 작품성을 인정받지 못했을뿐더러, 이때 유행했던 실내 건축양식과 어울리려면 보다 화려한 장식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사가 미국 우스터 미술관과 함께 서울 여의도 더현대 서울 ALT.1에서 개최한 ‘인상파, 모네에서 미국으로: 빛, 바다를 건너다’ 특별전에 걸린 르누아르의 ‘아랍 여인’(1882)의 액자도 화려하고 호화롭게 마감돼 로코코양식을 연상케 한다. 인상파 중에서도 화려하고 따듯한 화풍으로 유명한 르누아르는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폴 세잔 등과 함께 1874년 열린 ‘초대 인상파전’에 참여한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살바도르 문디.
살바도르 문디.
소더비가 인정…최종 진위는

12달러에 낙찰된 회화가 르누아르의 작품으로 추정된 건 마코우가 소더비를 통해 감정을 받으면서다. 소더비는 크리스티와 함께 미술품 경매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옥션하우스로, 자체 감정기구를 운영하고 있다. 아트뉴스에 따르면 소더비 측은 마코우가 의뢰한 작품이 르누아르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밝혔다. 르누아르의 작품이 크기와 주제, 제작 시기 등에 따라 수억 원에서 수백억 원까지 거래되고 있는 만큼, 진품이 맞다면 이 작품 역시 억 단위의 가격이 매겨질 것이란 평가다. 국내에선 르누아르의 ‘딸기가 있는 정물’이 2020년 케이옥션을 통해 6억9000만 원에 낙찰된 사례가 있다.

다만 작품이 진품으로 인정받기 위한 절차가 끝난 것은 아니다. 현재 이 작품은 미국 뉴욕에 위치한 미술연구기관 와일덴슈타인 플래트너 연구소(Wildenstein Plattner Institute)에서 진위 여부를 감정하고 있다. 아트뉴스에 따르면 마코우는 “철저한 검증과 전문가의 분석이 중요한지 알고 있는 만큼 이번 감정을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저가에 팔리거나 무명 작가가 그린 것으로 여겨졌던 작품들이 훗날 진품으로 밝혀져 가격이 급등하는 사례는 종종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살바도르 문디’(1505~1515 추정)가 대표적이다. 1958년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45파운드(약 8만원)에 팔린 이 그림은 2017년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5030만 달러(당시 약 5000억 원)에 매각됐다. 중동 최고의 부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대리인을 내세워 사들인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