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형석 칼럼] "차라리 미국 기업이 되겠다"
국내 유통회사 최초로 연 매출 40조원을 넘어선 쿠팡은 지배구조가 독특하다. 한국에서 사업 대부분을 영위하지만, 모기업 쿠팡Inc는 미국 델라웨어주에 기반을 준 외국 기업이다. 쿠팡이 ‘국적’을 포기하면서 얻은 이익은 한둘이 아니다. 비전펀드 등 해외 투자자로부터 4조원 이상의 장기 투자금을 유치하고, 뉴욕거래소에서 기업공개(IPO)에 나서는 과정에서 미국 기업이라는 ‘간판’ 덕을 톡톡히 봤다.

적용받는 법체계도 국내 기업과 다르다. 델라웨어주 회사법은 이사회 관련 규정이 느슨하다. 이사를 한 명만 둬도 되고, 감사위원회 설치 의무도 없다. 최소 세 명의 이사진을 갖추고, 사외이사를 포함하는 감사위원회를 의무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한국과 대조적이다.

국내 기업은 언감생심인 대주주 차등의결권까지 허용한다. 쿠팡 창업자인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은 지분 8.8%만 보유하고 있지만, 73.7%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주당 29개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클래스B’ 주식을 김 의장만 보유하고 있어서다.

쿠팡의 승승장구 때문일까. 자본과 인재 유치, 규제 회피 등을 목적으로 회사의 근거지를 해외로 이전하는 ‘플립(flip) 기업’이 부쩍 늘었다. 플립은 해외 법인을 설립한 뒤 한국 본사의 주식과 맞교환하는 방식 등으로 회사의 국적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데이터 업체 더브이씨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해외에 본사를 둔 한국 스타트업은 186개다. 10년 전인 2014년보다 6배 증가한 수치로, 대부분 미국으로 둥지를 옮겼다. 미미박스(뷰티), 센드버드(AI 챗봇), 스윗테크놀로지스(기업용 협업 도구) 등 중견 스타트업 중에도 본사를 이전한 사례가 적지 않다. 최근엔 자율주행, 원격진료 등 규제로 사업 확장이 어려운 업종의 스타트업이 플립을 추진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한국에서 탈출하는 것은 기업만이 아니다. 영국 컨설팅회사 헨리앤드파트너스에 따르면 지난해 미화 100만달러(약 14억6000만원) 이상을 보유한 한국 부자 중 1200명이 해외로 이주했다. 세계 4위에 해당하는 기록으로, 2년 전인 2022년보다 빠져나간 인원이 3배 늘었다. 증여·상속세 부담이 이들의 등을 떠밀었다는 분석이 많다. 이공계 석·박사급 인재의 해외 유출은 이제 뉴스도 아니다. 2013년부터 10년간 한국을 떠난 인원이 9만6000명에 달한다. 자본시장은 또 어떤가. 2019년 말 기준 84억달러(약 12조3000억원)에 불과하던 ‘서학개미’의 미국 주식 투자액은 지난해 말 1000억달러(약 145조8000억원)를 넘어섰다. ‘국장 탈출은 지능 순’이란 푸념은 이미 철 지난 유행어다.

최근엔 가뜩이나 인기가 없는 한국에 악재가 하나 더 생겼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의 대미 수출품에 ‘폭탄 관세’ 부과를 결정했다. 90일 유예기간이 끝나면 25% 세율이 적용된다. 관세를 덜 내고 싶으면 미국에 생산기지를 지으라는 으름장이다. 지금 분위기라면 대미 수출 비중이 높은 제조업체의 투자 재원 역시 빠른 속도로 한국에서 탈출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이 시나브로 껍데기만 남고 있음에도 정부와 정치권의 대응은 안일하기만 하다. 기업과 인재, 자본을 해외로 내쫓는 법과 제도는 개선될 기미가 없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쥔 거대 야당은 한술 더 떠 ‘규제 철옹성’을 쌓을 기세다. ‘노란봉투법’을 필두로 한 친노동 법안과 ‘더 센’ 상법 개정안 등을 앞세워 기업을 옥죄기 바쁘다. 이런 상황에서 ‘차라리 미국 회사가 되겠다’는 스타트업에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