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는 1000여 년 전 블타바 강변에 세운 도읍지 프라하를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16세기부터 약 400년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야 변화의 전환점을 맞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와 함께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이름으로 독립국가를 수립했다. 그 후 나치독일의 점령, 공산주의, 1968년 '프라하의 봄’, 1989년 '벨벳 혁명’ 등을 거친 다음에는 1993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조용히 갈라지는 등 수차례의 격동기를 거쳤다. 이러한 격동기 속에서도 수도 프라하는 아름다운 옛 시가지를 거의 그대로 보존해 왔다.
오로지 체코인들의 손에 의해 디자인된 아르누보 양식의 시민회관 / 사진. © 정태남
오로지 체코인들의 손에 의해 디자인된 아르누보 양식의 시민회관 / 사진. © 정태남
프라하에는 중세 고딕에서 르네상스, 바로크와 로코코, 신고전주의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건축물이 구석구석 공존하고 있는데 그중 고딕 양식 건축물들이 두드러진다. 프라하 구시가지 동쪽 입구에는 19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복원된 탑문이 있다. 이것은 오스트리아 군대가 한때 화약고로 사용했다고 하여 보통 '화약탑’으로 불린다. 이 탑문 바로 옆에는 건축양식이 완전히 다른 오베쯔니 둠(Obecní dům), 즉 ‘시민회관’이 눈길을 끈다. 프라하의 역사적 건물들 대부분은 독일 및 오스트리아 건축가들에 의해 세워졌지만 이 예술과 문화의 전당은 두 명의 체코 건축가 안토닌 발샤네크(1865~1921)와 오스발트 폴리프카(1859~1931)에 의해 1905년에 착공, 1912년에 완공되었다.
시민회관의 옥외카페와 화약탑. 이 탑문은 프라하 중심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 사진. © 정태남
시민회관의 옥외카페와 화약탑. 이 탑문은 프라하 중심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 사진. © 정태남
체코 아르누보의 결정체

시민회관은 매우 화려하다. 하지만 구조는 엄격하다. 즉 신고전주의적 좌우대칭과 위계적인 입면 구성이 기본을 이루고, 그 위에 아르누보 특유의 유려한 장식이 펼쳐진다. 특히 화려한 돔, 아치, 모자이크 그림, 발코니 난간의 철제 장식을 비롯, 꽃잎과 나뭇잎에서 영감받은 섬세한 디테일이 돋보인다.

한편 프랑스어로 '새로운 예술’이란 뜻의 아르누보(art nouveau)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럽 여러 나라에서 널리 퍼진 양식으로, 주로 건축 및 장식 미술과 관계하여 발전했다. 그 이전의 건축이나 공예는 그 전형(典型)을 그리스, 로마 또는 고딕에서 구한 데 반하여, 아르누보는 이러한 역사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자연형태에서 모티프를 빌려 새로운 표현을 얻고자 했다. 체코, 특히 프라하에서는 아르누보가 국가 정체성과 민족주의 운동과 결합되어 특별한 방식으로 발전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시민회관이다.
시민회관 입구의 발코니. 상부에 모자이크 <프라하에 바치는 경의>가 눈길을 끈다 / 사진. © 정태남
시민회관 입구의 발코니. 상부에 모자이크 <프라하에 바치는 경의>가 눈길을 끈다 / 사진. © 정태남
민족주의 관점에서 시민회관의 외관에서 주목할 것은 발코니 상부 아치를 장식하는 체코 화가 카렐 슈필라르(1871~1939)의 모자이크 그림 <프라하에 바치는 경의>와 체코 시인 스바토플루크 체흐(1846~1908)의 문구 "그대에게 영광을, 프라하여! 세월의 분노에 맞서라, 그대가 오랜 세월 모든 폭풍을 견뎌낸 것처럼!(Zdar tobě Praho! Vzdoruj času zlobě jak odolalas věky bouřím všem!)”이다.

즉 이 모자이크 그림과 문구는 프라하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어려움과 도전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견뎌내고 번영을 이어온 도시임을 찬양하며, 앞으로도 그러한 역경을 이겨내길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시민회관의 상징성과도 부합하며, 도시의 문화적 자부심을 드러낸다.

시민회관 내부는 외부보다 더 풍부한 장식과 예술로 가득하다. 특히 라운드 홀과 시장 홀에는 알폰스 무하(1860-1939)의 회화와 장식 작업이 집중되어 있는데 시장 홀의 프레스코화 〈슬라브의 화합〉은 무하의 슬라브주의적 신념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슬라브 민족들의 단결과 평화를 이상화된 형상으로 구현하고 있다.
시민회관의 심장인 화려한 스메타나 홀 / 사진. © 정태남
시민회관의 심장인 화려한 스메타나 홀 / 사진. © 정태남
시민회관 내부에서 압권을 이루는 공간은 1200석 규모의 음악당인 스메타나 홀이다. 이 홀은 여러 예술가들의 협업이 빛나는 공간이다. 한편 베드르지흐 스메타나(1824~1884)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체코의 민족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체코의 역사와 전설, 또 체코의 여러 지역을 소재로 한 음악을 작곡하는데 혼신을 기울였던 '체코 음악의 아버지’이다.

그런가 하면 시민회관 내부의 레스토랑과 카페는 구석구석 아르누보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마치 알폰스 무하의 포스터 속 여인이 앉아 차를 마실 법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구석구석 아르누보 양식으로 장식된 시민회관의 레스토랑 / 사진. © 정태남
구석구석 아르누보 양식으로 장식된 시민회관의 레스토랑 / 사진. © 정태남
그러고 보면 시민회관은 건축가만의 작품이 아니라 당대 체코 예술가들이 총동원된 공동 창작물로 외세 지배 하에서 체코의 민족혼을 담은 '체코인의, 체코인에 의한, 체코인을 위한’ 문화의 전당이자 체코 아르누보 건축과 예술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체코 민족 정체성의 상징적 공간

시민회관은 체코의 현대사를 바꾼 두 개의 사건과 관련된 장소이기도 하다. 즉, 시민회관이 완공된 지 6년 후인 1918년 10월 28일, 바로 이곳 발코니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또 1989년 11월 26일에는 바로 이곳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 대표들과 반체제 인사 바츨라프 하벨이 이끄는 시민포럼의 대표들이 만나 처음으로 대화를 가졌다. 이리하여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른바 '벨벳 혁명’을 통해 자유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스메타나 홀에서는 매년 스메타나가 서거한 날인 5월 12일 전야에 체코 대통령을 비롯한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제’의 막이 오른다. 이 음악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창립 50주년이 되던 1946년에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고 1952년부터는 개막 음악으로 스메타나의 대표작 <나의 조국>이 연주된다.

이처럼 시민회관은 단지 아름다운 건축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프라하 시민들의 자부심이 살아 숨 쉬며, 예술과 민족 정체성, 민주주의의 이상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체코 민족정신의 상징적 공간인 것이다.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