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와의 인터뷰④
안네 덕희 요르단(Anne Duk Hee Jordan, 1978~)
자연과 테크놀로지, 철학과 예술 사이에서
유쾌하고도 진지한 대화를 시도하는 작가
치료사, 셰프, 다이버, 그리고 아티스트. 안네 덕희 요르단(Anne Duk Hee Jordan, b.1978)의 이력은 전형적인 예술가의 길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스위스에서 신체·운동 감각 치료사로 일하고 전기 공학을 공부하며 삶의 여러 갈래를 가로지르던 그는 비교적 늦게 예술에 발을 들였다. 2009년 베를린 바이스젠제 예술대학교에서(Kunsthochschule Berlin-Weißensee)에서 예비과정을 수료한 후, 베를린 예술대학교(UdK)에서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liasson)이 지도한 공간 실험 연구소(Institut für Raumexperimente)의 마이스터슐러 과정을 졸업하며 예술 실천을 본격화했다.
이처럼 비정형적인 삶의 궤적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그의 낭만적 태도를 반영하고, 작업 역시 경계를 넘나드는 낭만적 비전과 유머에서 출발한다. 움직이는 조각과 물과 뭍을 가로지르는 풍경, 기계장치와 유기체가 공존하는 설치 작업을 통해 그는 과학적 지식과 감각적 상상력을 교차시키고, 인간과 비인간, 수중과 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예술과 테크놀로지, 자연 사이의 새로운 대화를 시도한다.
개인적으로도 그와 같은 다이버로서 바다를 탐험하며 인간은 한낱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체감해보았기에 요르단이 펼친 세계에 매료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상상력이 전개한 세계에서는 인간과 비인간, 모든 존재가 병치 되어 순환과 소멸, 변화를 드러낸다. 이는 인간 중심의 시각을 넘어 생태 전체로 초점을 확장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유기적 미래를 상상하도록 이끈다.
새로운 ‘우리’라는 공동체적 개념이 절실한 기후 위기의 시대, 안네 덕희 요르단은 보다 보편적인 인간 감성과 경험에 호소하며 예술을 통해 낭만주의적 비전을 펼쳐 보인다. 그는 자연과 테크놀로지, 철학과 예술 사이에 유쾌하고도 진지한 대화를 시도하는 예술가다.
안네 덕희 요르단. / 사진. ⓒ Ricard Estay ▷ 한국 관객이라면 누구나 작가님의 이름에서 한국과의 관련성을 감지할 수 있을 겁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베를린을 기반으로 하여 활동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베를린에 정착하게 된 계기와 이곳에서 예술 활동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네, 제 이름에는 한국 이름이 있습니다. 친어머니가 부재한 상황에서 저를 돌봐주신 분이 지어주셨죠. 어머니가 사라진 후 저는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새도 없이 독일로 보내졌습니다. 저에게는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습니다. 저의 뿌리와 언어, 문화, 이 모든 것과 단절되었습니다. 그렇게 독일에서 자랐고, 26살에 베를린으로 이주해 미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저의 예술 활동은 이러한 이주와 혼종적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그렇다면 베를린은 작가님의 예술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베를린의 문화와 정치, 자연환경 등이 작가님의 사고 및 창작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더 듣고 싶습니다.
베를린은 항상 저에게 변혁의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재창조할 수 있었죠. 하지만 요즘은 무겁게 느껴집니다. 공기가 탁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뿐 아니라 정치·문화적으로도 독일에서 숨쉬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현재 상황이 흘러가는 방향, 다시 말해, 극우 세력의 부상과 민주적 가치의 침식, 문화예술의 조용한 해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무엇이 우선인지 궁금합니다. 민주주의를 가장한 파시즘일까요, 아니면 파시즘으로 퇴행하는 민주주의일까요? 그 경계가 모호합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가 더 이상 자유롭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유는 감시당하고 왜곡되며 조건부로 주어집니다.
가시성과 사라짐, 표현과 통제 사이의 긴장은 필연적으로 저의 작업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항상 그래왔죠. 저의 작업은 파열과 불안정, 그리고 돌봄과 의의가 무너져가는 구조에 대한 반응입니다. 저는 남겨진 것들로 세계를 구축합니다. 진흙과 조류, 해양 생태의 흐름, 따개비같이 시스템이 붕괴하여도 계속 생존하는 회복력 있는 것들로요.
▷ 2023년 알렉산더 레비(Alexander Levy) 갤러리에서 작가님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고대 해양 생명체가 떠다니며 확장하는 듯한 몰입적 공간과 그 유기적인 혼성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같은 바다와 해양 생명체는 작가님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작업에서 어떠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나요?
바다는 심층적 시간, 수백만 년의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작업에 주로 해양 생물 형태를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생물들이 선형적 서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저에게 진화적 관계를 상상하고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무생물을 연결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저의 피조물들은 상상의 존재이지만, 유충과 조류, 플랑크톤, 멸종된 종 같은 실제 생태계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합니다. 저는 모든 것이 연결된 생태계를 구축합니다. 마치 느린 시간과 퀴어한 시간, 얽혀 있는 시간의 그물과 같죠. 유토피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복합성 속에 공존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안네 덕희 요르단, Worlds Away, 2022, installation view YOYI! Care, Repair, Heal, Gropius Bau, Berlin, 2022. / 사진. ⓒ Laura Fiorio▷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 기계가 공존하는 이러한 생태계는 대안적으로 보입니다. 말씀하셨듯 이 생태계는 허구적이지만 생태적 현실에 기반으로 합니다. 여기에서 작가님에게 허구 또는 사변적 스토리텔링은 어떤 역할을 하나요?
허구는 필수적입니다. 그것은 다른 세계가 자랄 수 있는 틈새를 만들죠. 저는 현실주의에는 관심이 없고, 가능한 것, 거의 가능한 것, 아마도 가능한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변적 스토리텔링은 저에게 현실을 더욱 풍부한 것으로 비틀 수 있도록 해줍니다.
▷ 초기 작업에서는 감자 – 독일 음식 문화에서 중요한 상징이지만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작물 – 를 자주 사용하셨죠. 재료로서 감자에 끌린 이유는 무엇이고, 작품에서 감자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궁금합니다.
감자는 저와 같습니다. 고향에서 떨어져 다시 뿌리내린 존재입니다. 감자는 식민지 무역로를 통해 유럽에 왔고, 누구도 감자에게 그곳에 가고 싶은지 묻지 않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뿌리째 뽑혀 옮겨 심어졌습니다.
초기 작품인 '2017-진행 중'이나 '2009' 같은 작품에서 저는 감자를 이주민의 몸이자 기억의 인공 삽입물로 사용했습니다. 감자는 겉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조용하게, 보이지 않게 땅속에서 자라죠. 감자에서는 회복력과 유령 같은 분위기가 동시에 느껴집니다. 저는 그러한 것과 연결되었습니다.
안네 덕희 요르단, Culo de Papa (감자 엉덩이), 2021. 설치 전경과 디테일. / 사진. ⓒ theta.cool▷ 정체성을 다루는 또 다른 작품 <Diasporae>(2021-22)는 이주와 경계에 대한 아이디를 시각적으로, 개념적으로 탐구합니다. 디아스포라 개념은 작가님에게 개인적, 예술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나요?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그 개념에 대해 어떻게 접근했나요?
저에게 디아스포라는 단순히 위치가 아니라 어느 쪽에 있다고도 할 수 없는 존재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부재와 변형에 대한 끊임없는 절충이죠. <Diasporae>는 움직이는 신체의 일부이자 표류하는 씨앗, 유령 에너지로 작동하는 기계를 중심으로 구축된 작품으로 이들 간의 긴장에서 탄생했습니다. 기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내면에 지니고 있는 존재에 대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예술적으로 연약함과 알려지지 않은 혈통, 그리고 부드러운 반항을 위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는 식민지 무역로에 대해, 그리고 식물과 사람, 데이터가 대체된 추출 회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식민지화 상황에서 세상이 어떻게 분열되기 시작했는지, 지식이 어떻게 분류되고 상품화되었는지를 추적합니다. 일례로, 식물원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죠. 식민지 실험실은 소위 ‘이국적인’ 식물군을 제국 경제를 위해 목록화하고 통제하기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이들은 꽃잎과 색소를 통해 제국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식물에 대해 말하는 방식조차도 그러한 유산으로 특징지어집니다. 18세기 유럽의 식물 분류학에서 꽃을 성적 대상화 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스웨덴 식물학자 칼 폰 린네(Carl von Linné)는 꽃을 ‘신방’이라 불렀고 수술과 암술에 집착했지만 실제로 식물 종의 75% 이상이 무성 생식하거나 비이분법적 시스템을 통해 번식합니다. 당시는 자연 세계가 이분법과 계층 구조, 소유권으로 재구성되고 유동성이 고정된 범주로 덮여있는 시대였습니다. 이 작품은 그러한 분류에 대한 저항입니다. <Diasporae>는 무질서하나 풍부한 모호함과 정해진 틀에 맞지 않는 존재를 기꺼이 끌어안고 있습니다.
Anne Duk Hee Jordan and Pauline Doutreluingne, Diasporae, 2021, video, sound, mixed media, Installation view ngbk, Berlin, Germany. / 사진. ⓒ artist and ngbk▷ 한편, 2023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작품 <So Long and Thanks for All the Fish>는 과거 불교 사찰이었던 곳에 설치되어 이 공간을 사변적인 생태계로 탈바꿈시켜 불교 철학과 생태 서사를 엮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이 작품에 담긴 작가님의 ‘인공적 어리석음(Artificial Stupidity)’이라는 개념은 어떤 의미이고, 인공지능과는 어떻게 대조되나요?
이 작품은 저에게 정말 소중한 작품입니다. 저는 사찰을 살아있는 유기체, 즉 해양 생물과 전자 제품, 식물성 물질이 공존하는 포스트-인간(post-human), 포스트-영적인 생물권(post-spiritual biosphere)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저는 불교의 윤회 사상을 생태적 피드백 루프와 융합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에서 물고기는 조상이자 화신(avartar)이고, 로봇 징은 죽은 승려들에게 말을 걸고 있었죠. 징이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마다 무언가가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인공적 어리석음(AS)’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AI에 대한 맹목적인 낙관주의에 대한 제 반응입니다. AS는 느림과 쇠퇴, 거부에 관한 것입니다. AS는 엉망진창이고 비논리적이며 비효율적인 것을 존중합니다. AS는 실패와 기이한 지능을 포용하죠. 최적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인식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 이 작품에서처럼 작가님은 종종 키네틱 조각을 사용해 설치 작업에 움직임을 부여합니다. 움직임을 매체로 사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움직임이 작가님의 작업에서 중요한 이유도 궁금합니다.
움직임은 사물을 살아있게 만듭니다. 기계조차도 움직일 때 숨을 쉽니다. 저는 항상 키네틱 아트에 매료되었습니다. 장 팅겔리(Jean Tingely)가 그러한 예죠. 달팽이나 나뭇잎의 떨림처럼 눈에 띄지 않는 움직임에도 매료됩니다.
저에게 그러한 움직임은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에게 연결에 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도 함께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죠. 제 작품에서 기계과 돌, 진흙은 모두 함께 움직입니다. 이는 상호의존성, 함께 하는 것에 대한 안무입니다.
안네 덕희 요르단, So Long and Thank You for The Fish, 2023. / ⓒ glimworkers/the artist and Gwangju Biennale Foundation▷ 더불어 작가님의 작업에서는 유머와 유쾌함이 느껴집니다. 키네틱한 제스처를 통해서든, 아이러니한 제목을 사용해서든 말입니다. 유머가 예술적 언어에서 어떤 기능을 한다고 보시나요? 비판의 도구인가요, 돌봄의 제스처인가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요?
유머는 생존입니다. 유머는 사람들을 무장 해제시켜 두려움 없이 가까워지도록 돕죠. 저의 작품에서 유머는 종종 고통과 트라우마, 부조리, 갈망을 가려줍니다. 하지만 기쁨과 장난, 호기심을 위한 공간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저는 마치 주문이나 속담처럼 제목을 사용합니다.
▷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작가님은 앞으로 예술을 통해 어떤 질문이나 주제를 탐구하는 데 가장 관심이 있나요?
저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 즉 몸과 자연환경 모두에 남겨져 맴돌고 변화하며 공명을 일으키는 질문에 끌립니다. 라이브 프로세스나 시스템이라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현재의 긴급성에 대한 반응으로서, 시대와 발맞추며 더 많은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생태적·사회적·정치적으로 일어나는 일과 함께 제 작업이 숨 쉬게 하고 싶습니다.
또한 저는 말할 수 없거나 발언이 허용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주체성을 부여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침묵 당한 자와 감춰진 자, 비인간 같은 존재들 말입니다. 저는 이들의 조용한 지능을 증폭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묻고 싶습니다. 스펙터클이 없는 저항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아카이브를 넘어 존재하는 지식의 형태는 무엇일까?
앞으로의 작업에서는 부드러운 인프라, 얽혀 있는 시스템, 사변적 연대에 대해 계속 탐구할 것입니다. 저는 기술이 생태를 만나고 디아스포라가 신화를 만나며 기억이 코드를 만나는, 주변부에서 나타나는 세계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무시된 것을 감지하고 그러한 존재가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하는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에 대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