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아르헨티나의 '침대 밑 달러'
1997년 겨울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 국가 부도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 한국은 3년 반 만인 2001년 여름 IMF 체제를 벗어났다. 뼈를 깎는 경제 체질 개선과 ‘금 모으기 운동’ 같은 국민의 동참이 있었기에 예정을 2년8개월 앞당겨 조기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23차례나 구제금융을 받은 IMF의 ‘단골손님’ 아르헨티나는 달랐다. 우리가 IMF를 졸업하던 해에 뱅크런이 발생했고, 정부는 모든 은행 계좌를 1년간 동결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월 인출액을 1000페소로 제한했고 달러 예금은 페소로 강제 전환했다.

계좌 동결에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는 곧 대규모 유혈 폭동으로 번졌고, 그 후 2주일 동안 대통령이 네 번이나 바뀌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대행의 대행의 대행’ 체제인 우리가 손가락질할 일은 아니지만, 한때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부유한 국가였던 아르헨티나는 그렇게 모라토리엄(채무 지급 유예)과 디폴트(채무 불이행)의 대명사 격인 나라가 됐다.

정부와 은행을 믿지 못하게 된 아르헨티나 국민은 돈이 생기는 족족 달러로 바꿔 침대 매트리스(스페인어로 colchon) 밑에 저축하듯 채워 넣었다. 이른바 ‘콜촌 은행’이다. 물가는 치솟고 페소화 가치가 추락하다 보니 아무리 높은 금리를 준다고 해도 은행에 돈을 넣어둘 이유가 없었다. 극심한 경제정책 변화로, 자고 일어나면 자국 화폐의 돈값이 떨어지는 나라의 사람들이 믿을 건 오직 달러뿐이었다. 몇 년 전엔 이란의 침대 밑 달러 및 유로화 규모가 최대 250억달러에 달한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아르헨티나 국민의 미신고 보유 달러는 그 10배가 넘는 2712억달러(약 380조원)로 추정된다.

하비에르 밀레이 정부가 조만간 ‘침대 밑 달러’ 대책을 발표한다고 한다. 새 정권 출범 후 일반적으로 실시하던 지하자금 양성화 제도인 ‘블랑께오’(은닉 재산 면세)와는 다른 모양이다. 취임 후 과감한 ‘전기톱 개혁’으로 ‘남미의 병자’를 살려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밀레이가 어떤 묘수로 침대 밑에서 잠자는 달러를 깨워 경제 회복에 활용할지 주목된다.

김정태 논설위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