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위해?' 정작 당사자들은 "필요 없다"…선거 공보물의 역설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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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정했어요"…노인들 공보물 안 봐
21대 대선 종이 공보물에 '370억원' 투입
전문가들 "논문도 종이 안 쓰는 시대"
21대 대선 종이 공보물에 '370억원' 투입
전문가들 "논문도 종이 안 쓰는 시대"

일부 공보물은 쓰레기봉투 위에 던져져 있기도 했다. 단지 주민 A씨는 "받자마자 버렸다. 누굴 찍을지는 이미 정했다"고 말했다.
이 공보물들은 누구를 위해 제작된 것일까. 법적으로 모든 유권자에게 배달되어야 하는 '공적 선거자료'지만, 현실에서 가장 큰 명분은 '고령층 정보 접근권 보장'이다.
디지털 기기보다 종이 매체가 익숙한 노인을 위해 종이 공보물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 그러나 실제 노인들의 반응은 그와 사뭇 달랐다.
◆"종이는 눈 아파요"…노인들도 외면

영등포구에 사는 정원식(78) 씨는 "아예 보지도 않는다. 마음에 있는 사람 그냥 찍지. 나뿐만 아니라 다른 노인들도 85%는 안 볼 거다. 정말 다 그대로 버린다. 이거 낭비라는 기사에 꼭 실어달라"고 말했다.

성북구에 거주하는 한예석(80) 씨는 "공보물 봤다. 근데 어차피 OOO 후보 찍을 거다. 바꿀 생각 없어서 공약도 안 본다 귀찮고 필요도 없다"라며 웃었다.
공보물은 '노인을 위한 종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정작 노인들은 종이가 낭비라고 말할뿐더러 대다수가 이미 결정을 끝낸 상태였다. 다시 말해, 공보물이 본래 의도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노인은 필요 없다는데 젊은 층 "종이 필요해" 주장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노인을 위한 종이 공보물의 존치를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쪽은 오히려 젊은 세대였다.대학생 김예주(21)씨는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그래도 종이가 더 익숙하지 않냐. 선거는 공적인 거니 사기업이 쓰는 키오스크처럼 바꾸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박진혁(24) 씨도 "분명 휴대폰 없는 분도 아직 있다. 선거는 공정해야 하기 때문에 누구나 정보를 접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알려야 하는 정보이기 때문에 고령층에겐 종이가 여전히 필요할 수도 있다"며 "디지털이 익숙한 젊은 층과 달리 고령자는 디지털 리터러시가 낮기 때문에 종이 공보물이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공보물은 특히 소수 정당이나 무소속 후보에게는 유일한 대중 접점이기도 하다. 거대 양당의 TV 광고, 유세차량,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홍보에 밀려 설 자리가 없는 후보들에게 공보물은 법적으로 보장된 유일한 플랫폼이다.
◆거대양당 8장짜리 공보문…결국 쓰레기

이번 제21대 대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8장짜리 공보물을 제작해 전국 유권자에게 배포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2장,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 송진호 후보(무소속), 황교안(무소속) 후보 등은 1장 분량으로 공보물을 제작했다.
특히 이준석 후보와 권영국 후보는 공보물에 큐알(QR)코드를 삽입해 유권자가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으면 정책과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이준석 후보는 "수천만 부 공보물을 제작하는 관행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디지털 전환의 필요성을 명시하기도 했다.
다만 정치권 관계자에 따르면 "이준석 후보는 거대 양당 후보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자금으로 선거를 치르고 있어 공보물 간소화는 비용 절감 목적이 더 컸다"는 해석도 나온다.

인천에 거주하는 강민욱(32) 씨는 "'서민 경제', '공정 사회', '안전한 나라'라는 추상적인 문구만 가득하고, 유권자 입장에선 차별성이 없다는 인식이 강한 거 같다"며 "공약 내용이 비슷비슷해서 뭘 봐도 달라지는 게 없다. 그냥 마음에 드는 사람 찍는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이지영(29) 씨는 "다른 건 다 전자 방식으로 바뀌고 있지 않냐. 노인 배려는 좋은데, 당사자들이 필요 없다는데 왜 계속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종이 공보물 4700만부, 세금 370억원 투입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제21대 대선에서 발송된 책자형 공보물은 약 2400만 부에 이르며, 전단형 공보물까지 포함하면 총 4700만 부에 달한다.
선관위는 "정확한 예산은 선거 이후 확정되겠지만, 제20대 대선 기준으로 공보물 발송에만 320억원이 들었고, 이번엔 약 370억원이 편성됐다"고 밝혔다.
유권자 다수가 읽지도 않고 버리는 종이 공보물에 300억 원이 넘는 세금이 쓰이는 셈이다.
이에 지난해 윤건영 민주당 의원은 전자식 공보물 도입을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하지만 '종이와 전자 공보물 간 발송 시기 차이에 따른 형평성 문제', '이동통신사의 개인정보 제공 실현 가능성' 등이 논란이 되며 국회 문턱은 넘지 못했다.
◆전문가들도 "방식 바꿀 때 됐다"
전문가들도 선거 문화 변화의 필요성을 제기한다.홍종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의 선거문화는 유독 특이한 면이 있다. 플래카드 문화만 봐도 그렇다"며 "선거 복이나 플래카드 등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선거가 끝난 후 이를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도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이제는 관공서나 학계에서도 종이를 거의 쓰지 않고 논문도 디지털로 유통되는 시대"라며 "선거에 쓰이는 종이는 가격도 비싸고 모두 세금으로 충당되는 만큼, 이제는 온라인으로 전환해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나라는 휴대폰 보급률이 매우 높고, 노인층도 유튜브 등 디지털 환경에 많이 익숙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세대별로 보면 아무래도 노인층이 디지털 소외계층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종이 공보물이 다소 낭비처럼 보이더라도 일정 부분은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면서도 "다만 노인만 포함된 가구에만 공보물을 보내는 식으로 세대 구분을 하는 게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
석 교수는 "환경 문제도 있고, 종이를 사용하는 데 따른 폐기물 처리 비용 역시 결국 국민이 부담해야 하므로 어떤 방식이 행정비용이 더 적게 드는지는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며 "디지털 디바이드로 인해 소외되는 계층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전자정보화가 많이 이뤄진 현재로선 행정적으로 유별난 비용이 들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유지희 한경닷컴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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