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어 '띠로리'가 바흐의 위상을 떨어뜨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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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현호의 바벨의 도서관재즈의 위상
해넘이가 완전히 끝난 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시작됐을 무렵 해인사에 도착했습니다. 주파수를 맞춰 놓았던 라디오가 숲길에 접어들어 멈췄다가 갑자기 청명한 음악을 흘려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해인사 답사를 라디오가 축하해주는 듯했습니다. 그때의 음악은 다름 아닌 듀크 조던의 <플라이트 투 덴마크> 속 ‘에브리씽 해픈스 투 미(Everything happens to me)’였습니다. 이 곡은 제목처럼 여행의 설렘을 담았습니다. ‘지금부터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겠구나’ 하고 말이죠. "어서들 와"라고 환영해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듀크 조던 - Everything Happens to Me]
치과 음악
원래 저희 집 아이들에게 재즈는 치과 음악에 불과했습니다. 오스카 피터슨, 키스 재릿, 빌 에반스와 같은 위대한 재즈 음악가들의 명반을 틀고 설거지하고 있으면, 당시 일곱살배기였던 막내가 종종 말을 건넸습니다. "어, 아빠, 이거 ○○치과에서 나오는 음악인데? 진짜야, 이거 ○○치과 음악이야"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의료용 기계음으로 왠지 모를 공포를 유발하는 치과병원은 그것을 상쇄하기 위해서인지 늘 근사한 실내건축디자인를 갖추고 카페처럼 세련된 음악까지 틀어놓곤 합니다. 보통은 가사가 없고 저작권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음악을 재생하기 일쑤인데요. 그래서 고전 명반이나 재즈 대가의 레이블을 만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배경음악은 흐릅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다양한 종류의 재즈 음악은 그저 ‘치과 음악’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1980년대에 '경음악'이나 '뉴에이지'로 분류되었던 많은 음악도 그러했죠. 시대를 풍미했던 피아니스트 조지 윈스턴도 스스로의 음악을 특정 장르에 가둬 두길 꺼렸지만, 사람들은 그를 두고 ‘뉴에이지 작곡가’라고 규정해버리곤 했으니 말입니다. 요즘에 와서 평가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에 대해서도 단지 ‘뉴에이지’나 ‘영화 OST’ 정도로 한정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다만, 이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예술의 세계에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고, '치과에서 나오는 음악'이라고 해도 그 가치를 폄훼할 수 없다는 사실에도 대부분 동의할 것입니다. 가벼운 음악과 무거운 음악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사카모토 류이치 - The Last Emperor]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띠로리'
어린아이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당황스러운 순간을 맞닥뜨리면 이렇게 말합니다. “띠로리”라고 말이죠. 어린이들이 먼저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은 아닐 터이고, 아마도 신조어가 돌고 돌아 어린이의 세계까지 전달된 것이라 짐작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띠로리’는 ‘띠로리’ 가 아닙니다. 띠로리의 시작을 알리는 음 ‘라솔라’는 사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 단조 BWV 565’ 도입부입니다. 언제부터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확인할 도리가 없지만, 이제는 고전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조차 ‘띠로리’를 ‘당황스러움’으로 인지하곤 합니다. 그런데, 보통은 파이프 오르간이나 피아노로 연주하는 ‘띠로리’는 그 첫 마디가 시작된 이후에 8~9분이 더 연주되는데요. 끝까지 들어야만 온전한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음악이기도 합니다.
다만 토카타와 푸가 D 단조가 ‘띠로리’로 불린다고 해서 위대한 작곡가 바흐를 향한 역사적 평가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의 후진음으로 사용되는 ‘엘리제를 위하여’와 유선 전화의 착신 전환음으로 종종 활용되는 ‘호두까기 인형 꽃의 왈츠’로 인해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표트르 차이코프스키의 명성에 흠이 갈 일도 없죠. ‘엘리제를 위하여’가 ‘띠리리리’로 불려도 그 위상이 낮아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Toccata & Fugue D Minor, BWV 565]
장소가 아닌 비장소(non-place)
일찍이 세계적인 건축가 렘 콜하스(Rem Koolhaas)는 우리가 잠시 머물거나 스쳐 지나갈 뿐인 고속도로, 공항, 정거장, 철도 역사 등을 정크 스페이스라고 분류한 바 있습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é)는 이들을 두고 비장소(장소가 아닌 곳)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문화인류학적 가치가 없고, 익명성과 복제성이 두드러지는 장소에 대해 그렇게 지위를 부여하기로 한 것이죠. 대체로 두 학자의 생각에 동의합니다만, 때때로 ‘재조명’이 필요한 것이 바로 비장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장소와 비장소의 경계가 참 모호하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면 이런 것이죠. 원래 우리에게, 차량으로 가득한 고속도로의 풍경은 명절의 민족 대이동 때에나 볼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요. 정주할 수 없는 이 유목적 장소는 <라라랜드(2016)> 이후로는 위상이 좀 달라졌습니다. 꽉 막힌 고속도로에 서면, 왠지 차량 밖으로 뛰쳐나오며 다 같이 ‘어나더 데이 오브 선(Another day of sun)’을 부르게 될 것 같으니 말입니다.
[La La Land - Another Day of Sun]
공항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난히 출장이 잦았던 아버지를 만나러 공항으로 가는 길은 출발부터 설레었는데, 결코 ‘장소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굳게 닫혔던 입국심사대의 문이 활짝 열리고 마침내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을 때의 반가웠던 마음은 공항을 추억의 장소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영화 <러브 액츄얼리(2003)>의 마지막에 런던의 히스로(Heathrow) 공항서 이별하고 재회하는 사람들을 모자이크처럼 담아낸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인연도 나타날 법한 공항의 입국장을 비장소나 정크 스페이스로 분류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큽니다. 비장소는 언제든 장소성을 갖게 되는 듯합니다.
변하거나 변하지 않거나
주말 저녁 식사를 위한 배경음악으로 라디오를 틀어 놓으니 아이들이 작은 투정을 부립니다. “아빠, 우리 오케스트라 대신 치과 음악을 듣자. 오케스트라는 너무 심각해”라고 말이죠. 재즈의 역사나 여러 갈래의 세부 장르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러자”며 오스카 피터슨과 빌 에반스의 명반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먼저 요청할 정도로 제법 재즈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띠로리’의 경우, 토카타와 푸가라는 설명에는 은근히 흥미를 보이면서도 여전히 바흐를 떠올리기보다는 놀라움을 뜻하는 감탄사 정도로 사용하곤 합니다. 뭐 그래도 괜찮습니다. 예술의 높고 낮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금 다양하다는 점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이처럼 다양함으로 가득하다는 사실만 알게 됐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불현듯 <플라이트 투 덴마크>를 듣고 싶은 새벽입니다.
김현호 칼럼니스트
[듀크 조던 - Flight to Denm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