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했다 패가망신"…사랑받던 '천재 스타'의 비참한 최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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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 거장
구스타브 쿠르베(1819~1877)
판사의 말에 남자는 머릿속은 새하얘졌습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전 국민이 사랑하는 미남 천재 스타인 내가 이런 죄를 뒤집어써야 한다니….’ 남자는 억울함과 절망감에 미쳐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 맞아. 내게 열광하는 팬들이 내 편을 들어줄 거야.’ 남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법정 안을 둘러봤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사람들의 얼굴에는 비웃음만 가득했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제 저 남자 인생은 끝났어. 90살이 다 될 때까지 벌금을 내기 위해 살아야 하는, 벌금의 노예가 됐으니 말이야.” 잔인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그의 이름은 구스타브 쿠르베(1819~1877). 그는 당대의 ‘스타 화가’였습니다. 끝내주는 그림 실력과 스타성으로 열광적인 팬들과 수많은 논란을 몰고 다녔지요. 파리 시민들의 입에 매일같이 이름이 오르내리던 인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는 19세기 서양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꼽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네·모네·르누아르 등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말하자면 ‘인상주의의 할아버지’ 같은 화가이기 때문입니다.
자존심만 센 바보?
1819년 프랑스 동부 지역(오르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쿠르베는 공부를 아주 싫어하는 남자로 자라났습니다. 학업에 뜻이 없었고 공부 머리도 전혀 없어서, 학창 시절 거의 모든 과목에서 꼴찌를 했거든요. 쿠르베가 법률가로 자라나길 바랐던 아버지도 그의 성적표를 보고는 한숨을 쉬며 뜻을 접어야 했습니다. 어른이 돼서도 쿠르베는 공부를 싫어했습니다. 다른 많은 지적인 예술가들과 달리, 그는 책을 읽는 걸 몸서리치게 싫어했고 아주 기본적인 맞춤법조차 틀렸습니다.그러면서도 자존심만큼은 엄청나게 강했습니다. 54세 때 캔버스라는 뜻의 프랑스어 단어(Toile) 철자를 틀렸다가(Toille라고 표기) 공개적으로 지적당하자, “그따위 것은 인생을 사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나 같은 위대한 사람은 단어를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치 무식함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 같은 ‘자존심만 센 바보’입니다.
하지만 쿠르베는 미술에서만큼은 성실한 천재였습니다. 스무 살 때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한 그는 금세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젊은 화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쿠르베에게는 더 많은 관심과 칭찬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다짐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천재 화가야. 모두에게 내 천재성을 인정받겠어.’ 그러려면 1년에 한 번 열리는 최고 권위의 전시회, ‘살롱전’에 작품을 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쿠르베의 이름은 프랑스 전역에 널리 퍼지기 시작합니다. 쿠르베의 그림 주제는 현실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과 풍경. 성경이나 신화 속 위대한 영웅들을 그리던 다른 화가들에 비하면 초라했습니다. 그런데 그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소재를 그린 작품들이 너무나도 새롭고 아름다웠습니다. 탁월한 그림 실력과 혁신적인 기법 때문이었습니다.
쿠르베가 그린 사실주의 작품들은 인상주의를 탄생시키는 데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세잔 등은 그를 깊이 존경했고, 늘 “쿠르베는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하나다. 우리는 그에게 정말 많은 빚을 졌다”고 말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이 순간 내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장면을 그리겠다는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인상주의와 그 목표가 거의 동일하거든요. 다만 인상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빛의 아름다움과 효과’에 집중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슈퍼스타 쿠르베
“진정한 슈퍼스타는 ‘빠’(팬)와 ‘까’(안티팬)를 모두 미치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적당한 수준의 안티팬은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내서, 스타의 화제성이 높아지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통찰을, 쿠르베는 홍보·마케팅 개념도 없었던 19세기에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홍보의 천재’였거든요.이렇게 충격적인 수준의 ‘자뻑’은 그의 본성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는 의도적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더 이상 논란이 되지 않을 때, 나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이다.” 쿠르베는 말했습니다. 항상 그가 ‘탄압받는 예술가’ 행세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그의 그림이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비판받았던 건 사실이지만, 쿠르베는 오히려 그걸 반기고 부추겼습니다. 1863년 살롱전에서 자신의 그림 전시가 거부당하자 남긴 말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아도 퇴짜맞고 싶었는데 잘됐군. 덕분에 내 반항아로서의 명성은 더 높아졌어. 이제 나는 더 부자가 될 거야.” 심지어 그는 일부러 그림을 이상하게 그려서 비판을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어설픈 실력이라면 이런 자기 홍보가 독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탁월한 실력 덕분에 엄청난 홍보 효과가 발생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쿠르베는 “들라크루아와 잉그르를 잇는 다음 세대의 대표 거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처음 사람들은 이를 비웃었지만, 그 소개는 점차 현실이 되어갔습니다. 쿠르베는 대중의 인기를 얻었고, 쏟아지는 그림 주문을 받아 큰돈을 벌었고, 유럽 각국의 인정을 받아 여러 나라의 훈장을 받았습니다. 쿠르베를 거부했던 프랑스 미술계도 결국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벌거벗고 다리를 벌린 여성을 가슴부터 넓적다리 중간까지 그린 작품 ‘세상의 기원’은 그의 예술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그림. 하지만 그 이미지가 얼마나 노골적인지, 21세기 서양에서도 그 작품 이미지 업로드를 놓고 논란이 일어날 정도입니다. 한국에서는 어떨까요. 사회 통념을 생각하면, 출판물이나 기사에서 소개하기가 다소 부담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쿠르베의 국내 인지도가 그 중요성에 못 미치는 데는 이런 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여기서도 원본이 아닌 작품이 등장하는 영화 포스터를 대신 소개합니다. ‘음란물이 아닌 예술’이라는 게 전 세계적인 평가라서, 원본이 궁금하신 분은 검색하면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정치에 발을 들이다
쿠르베는 정치도 마케팅에 활용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늘 프랑스 정부와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를 지배하는 권위적인 지배자들은 객관적으로 봐도 너무나도 무능했습니다. 그리고 51세가 되던 1870년, 마침내 그에게 프랑스 정부를 물 먹일 기회가 옵니다. 정부가 그에게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주겠다고 발표한 겁니다. 이는 자신의 이름을 유럽 전역에 홍보할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쿠르베는 기다렸다는 듯이 훈장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각 언론 매체를 통해 일종의 선언문을 공개합니다.“국가는 예술과 관련된 문제에 무능합니다. 국가의 개입은 예술가에게 족쇄를 채우고 예술에 해를 끼칠 뿐입니다. 제발 예술에서 손을 떼고 우리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십시오. 제게 주시는 영예를 거절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쉰 살이고 항상 자유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내 삶을 자유롭게 끝내게 해주십시오. 내가 죽으면 ‘그는 어떤 학교에도, 어떤 교회에도, 어떤 기관에도, 어떤 아카데미에도, 무엇보다도 자유의 정권을 제외한 어떤 정권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말하게 해 주십시오.” 당시 프랑스 정부에 대한 파리 시민의 민심은 바닥이었습니다. 선언문이 발표되자 쿠르베에게는 “용기 있는 존경스러운 예술가”라는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이듬해인 1871년, 쿠르베는 본격적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파리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기존의 정부가 무너지고, 사회민주주의 정부인 ‘파리 코뮌’이 들어선 게 계기였습니다. 옛 정부에 대항하는 상징과도 같았던 쿠르베는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예술위원회 의장이 되었습니다. ‘파리 예술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생전 처음 잡아보는 권력에 도취됐습니다. 쿠르베는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파리 시민들의 간절한 부탁으로 중요한 일들을 맡고 있습니다. 하루 열두 시간 동안 회의하며 어려운 사회 문제들을 논하느라 머리가 아프지만, 파리는 지금 시민들의 진정한 천국입니다. 제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쿠르베는 신나게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여러 국보급 유물을 보호하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좋은 일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실책도 여럿 저질렀습니다. 대표적인 게 파리의 방돔 광장에 있던 ‘방돔 기둥’을 철거한 것. 1803년 나폴레옹이 세운 이 청동 기둥은, 정부에 반감을 가진 이들에게 오랫동안 제국주의와 권위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졌습니다. 기둥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사람들은 쿠르베에게 달려가 “우리들 세상이 왔으니 저 흉물을 치워버리자”고 했습니다. 쿠르베는 그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천재 예술가의 비참한 말로
잠시 후퇴했던 정부군이 다시 반격에 나서면서, 파리 코뮌은 불과 두 달 만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주동자들은 줄줄이 붙잡혀 처벌받았습니다. 그리고 문화 분야의 ‘대표 역적’은 쿠르베였습니다. 쿠르베는 국가의 중요한 유물인 방돔 기둥을 훼손한 ‘문화유산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됐습니다.“억울합니다!” 쿠르베는 주장했습니다. 사실 그렇게 얘기할 만도 했습니다. 쿠르베가 방돔 기둥 철거에 찬성한 건 맞지만, 따지고 보면 이는 사람들의 요청을 들어줬을 뿐입니다. 게다가 쿠르베는 최종 결정권자도 아니었습니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그는 ‘주범’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간 쌓아온 노이즈 마케팅의 업보가 쿠르베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오랜 세월 그는 많은 적을 만들어왔습니다. 잘난 척이 지나쳤고,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을 빈정거리며 깔아뭉개곤 했으니까요. 또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의 이미지는 ‘권위주의 정부에 반대하는 예술의 투사’였습니다. 쿠르베 자신도 이로 인한 명성과 이익을 즐겨왔고, 덕분에 많은 재산을 축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새로 들어선 정부 입장에서 쿠르베는 이상적인 희생자였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됐습니다. 쿠르베가 주범으로 지목되자 평소 쿠르베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벼르던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 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방돔 기둥은 곧바로 다시 복구됐습니다. 사람들은 기둥을 볼 때마다 쿠르베를 비웃었습니다. 쿠르베는 막대한 벌금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스위스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큰 빚을 져서, 빚을 갚기 위해 계속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3년 뒤인 1877년, 스트레스로 인해 그간 앓던 간 질환이 악화돼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았습니다. 몸이 퉁퉁 부어서 20L에 달하는 체액을 빼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거침없이 살던 천재 화가의 삶은 그렇게 최후까지 극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쿠르베는 미술사의 전설입니다. 그건 미술의 본질을 말하는 쿠르베의 작품들, 즉 풍경화·초상화·정물화가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은 아름답고, 힘 있고, 혁신적입니다.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정치에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그는 더욱 위대한 성취를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 정치는 누구나 관심을 가져야 하는 중요한 일이긴 해도, 거기에 매몰돼 자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그의 삶은 들려주는 듯합니다.
*여의도 더현대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인상주의 특별전에서 쿠르베의 '고양이와 여인', 모네의 '수련' 등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만나실 수 있습니다. 전시는 5월 26일까지 열립니다.
**이번 기사는 Gustave Courbet(Gerstle Mack 지음), Gustave Courbet(Fabrice Masanes 지음), Gustave Courbet(Sylvain Amic 등 지음,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전시 도록),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줄리언 반스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평가,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7만여명의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앞서 다뤘던 화가들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그림들은 두 권의 책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과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으로 곁에 두고 즐길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www5s.sh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