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꼴리와 우아함의 경계에서 풀어낸 베르트랑 샤마유의 라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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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진섭의 한 판 클래식
베르트랑 샤마유의 '라벨 피아노 독주 전곡집(3 LP)'
프랑스 툴루즈에서 태어난 베르트랑 샤마유는 파리 고등음악원에서 장-프랑수아 에세르(Jean-François Heisser)를 사사했고, 런던으로 터전을 옮겨 정명훈을 가르쳤던 피아노계의 명스승 마리아 쿠르시오(Maria Curcio)와 90년대 세계에서 가장 민감한 건반의 마술사로 평가받았던 머레이 페라이어(Murray Perahia)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파리 고등음악원 시절 베르트랑 샤마유는 장-프랑수아 에세르를 따라 셍장드루즈에 위치한 <라벨 아카데미>에 자주 방문했고, 매년 여름마다 그곳을 찾아 공부하면서 라벨에 자연스럽게 흡수될 수 있었다고 한다. 라벨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블라드 펄레무터의 직계 제자이자, <라벨 아카데미>의 총책임자였던 장 프랑수아 에이서는 샤마유가 자연스러운 경험을 통해 라벨의 정통성을 잇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하길 바랐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라벨의 <물의 유희(Jeux d'eau, M. 30)> 악보를 처음 접했습니다. 순수하면서도 회화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어요. 다른 작곡가와 음악가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지만, 라벨의 음악은 저에게 항상 초석이 되었어요.”
- 베르트랑 샤마유 인터뷰 中
총 29곡이 3장의 LP에 담긴 리미티드 에디션
앨범은 샤마유가 어린 시절 처음 대면했던 곡 <물의 유희(Jeux d'eau, M. 30)>로 시작한다. 32분음으로 잘게 쪼개진 순간을 섬세하면서도 우아하게 표현하며 음 하나하나를 윤슬로 재탄생시킨다. 이어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 M. 19>와 <샤브리에 풍으로(À la manière de Chabrier, M. 63/1)>가 담담한 어조로 곡을 이끌고 가는데, 마치 <물의 유희>의 잔향을 다독여주는 듯하다.
<거울(Miroirs, M. 43)>에 이르러 그는 음악과 빛이 만나는 순간을 연주한다. 라벨의 작품을 해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색채감인데 샤마유는 이 지점을 명확하게 짚어낸다. <그로테스크한 세레나데(Sérénade grotesque, M. 5)>, <고풍스러운 미뉴에트(Menuet antique, M. 7)>, <보로딘 풍으로(À la manière de Borodine, M. 63/1)>,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Valses nobles et sentimentales, M. 61)> 등에서도 샤마유는 때론 화려하게, 때론 쓸쓸하게, 때론 우아하게 음악의 색감을 표현해낸다.
<밤의 가스파르(Gaspard de la nuit, M. 55)>는 동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연주가 인상적이다. ‘1번. 물의 요정’, ‘2번. 교수대’ 그리고, ‘3번. 스카르보’까지 샤마유가 표현하는 음악적 스토리텔링은 극적이면서도 역동적으로 다가온다. 이번 앨범에서 샤마유만의 해석이 가장 돋보이는 연주는 <소나티네(Sonatine, M. 40)>가 아닐까 한다. 잔잔하게 속삭이듯 연주하다가 휘몰아치는 아티큘레이션이 내내 긴장과 완화를 동시에 선사한다. 서정적 멜랑콜리와 빛나는 우아함의 경계 어딘가에서 연주하는 그의 노련함은 이 앨범에서 <소나티네>를 자꾸만 듣게 만든다.
베르트랑 샤마유 vs 조성진
베르트랑 샤마유가 10년 전 녹음한 <라벨 피아노 독주 전곡집>은 라벨 탄생 150주년을 맞이해 2년 전부터 프로젝트를 구상해 앨범을 내놓은 조성진과는 조금 다른 해석과 속도, 농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두 피아니스트 모두 악보를 중요시한 라벨의 의도에 충실하기 위해 집중력과 섬세함을 연주로 보여준 것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라벨 피아노 독주 전곡의 세트리스트를 구성하는 데 두 아티스트가 보여준 관점의 차이도 보인다. 앨범에 샤마유는 총 29곡을 담았고, 조성진은 총 31곡을 담았다. 샤마유는 라벨이 쓴 모든 곡을 고집한다기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완결성에 부합하는 곡들로 세트리스트를 만들어 전곡이라고 칭했다. 앨범을 녹음하면서 더 예리한 소리를 내기 위해 피아노 튜너에게 악기의 촉감을 조정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샤마유의 말은 매우 시크하면서도 프랑스적인 화법으로 들린다.
<라벨 피아노 독주 전곡집>은 누구 하나가 우위에 있다고 평가하기보다 명작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고 대물림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두 아티스트가 연주하는 라벨의 곡들을 함께 비교하며 듣는다면 인상파 작가들의 여러 그림 속에서 헤매다 나온 것 같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진섭 칼럼니스트·아르떼 객원기자
[베르트랑 샤마유의 라벨 피아노 독주 전집 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