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힘 받는 '마러라고 합의' 가능성…글로벌 금융시장 뒤흔들 '뇌관' [이상은의 워싱턴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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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 위원장이 내놓은 41페이지짜리 소논문 형태 보고서는 발간 즉시 그 대담함으로 화제를 모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심의 세계가 만들어 온 글로벌 금융질서 자체를 완전히 새로 짜자는 구상을 담고 있다. 구조적인 강달러를 해소하면서도 달러의 세계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동맹국과 비용을 분담하는 구조를 제안하는 이 보고서는 동맹국 압박을 위해 관세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트럼프 정부 출범 초기까지만 해도 미란 보고서는 ‘실현가능성이 없다’ ‘황당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은 다르다. 지난 두 달 동안 트럼프 정부가 추진해 온 관세 정책을 비롯해 다소 모호해 보이는 경제·통상·외교전략의 의미를 설명하고 이들이 꿈꾸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는 보고서로 비중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환율관리 글로벌 시스템 ‘재창조’
일반적으로는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보는 나라는 통화가치가 낮아지고 이로 인해 수출이 늘어나는 등의 균형을 되찾는 시스템이 작동하지만, 미국은 예외다. 전 세계에 준비자산을 제공하기 때문에 무역적자와 재정적자가 아무리 커도 미국 달러(USD)와 미 국채(UST)에 대한 수요가 존재한다. 미국의 수출품은 다른 나라처럼 비행기나 자동차가 아니다. 미 국채다. 미국 경제는 다른 나라에 국채를 팔고(수출), 그 대가로 다른 나라의 상품을 받아들임(수입)으로써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감당해야 하는 딜레마(트리핀의 딜레마)에 처해 있다.
미국 경제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수록 준비통화 공급에 따른 미국 수출부문의 ‘고통’은 훨씬 강해진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전 세계 총생산(GDP)에서 미국 GDP가 차지하는 비중은 1960년대 40%에서 현재 26%까지 쪼그라들었다. 이 기간 동안 유로화와 위안화 등 다른 통화의 사용 비중이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달러의 위상은 압도적이다. 보고서는 “미국 GDP가 세계 GDP 대비 비중이 축소됨에 따라 전 세계 무역과 저축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이 감당해야 하는 적자 규모가 점점 커진다”면서 “세계의 성장이 미국 수출에 주는 고통이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환율 관리 시스템 자체를 재창조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미란 보고서는 트럼프 정부가 ”글로벌 준비통화로서 달러 사용을 끝내기보다는 다른 국가들이 우리의 준비금 제공을 통해 받는 혜택의 일부를 되찾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목표는 세 마리 토끼
미란 보고서는 하나의 결론을 향해 가기보다는 이런 상황을 해소할 수 있는 몇 가지 과감한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목표는 크게 세 가지다. 구조적인 강달러를 해소하고, 미국의 제조업 부흥시키며, 동시에 미국의 기축통화국 및 패권국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지금껏 역대 미국 정부가 이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이 세 목표가 상충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축통화 공급국이 해당 통화 약세를 추구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값이 떨어질 것이 예정된 물건을 사는 사람은 없다.미란 위원장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소비시장의 위상과 안보 리더십을 활용해 동맹국에게 이 부담을 공동으로 지우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이른바 ‘마러라고 합의’다. 동맹국들이 가지고 있는 10년물 이하 단기 국채를 예를 들어 100년 만기 국채로 강제로 바꾸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초장기 국채는 거의 무이자 수준으로 발행하는 것이 핵심이다.
동맹국이 초장기국채를 거의 무이자로 산다면, 미국은 이자에 대한 부담 없이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기업이 무상으로 자본 투자를 받는 것과 비슷하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각국에 보유 달러를 팔도록 요구해 달러 가치 하락과 동맹국 통화가치 상승을 유도할 계획이다. 참여국가는 장기 금리 변동(채권값 변동)의 리스크를 져야 하는데, 이는 미국 중앙은행(Fed)이나 재무부와 통화스와프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구상이다.
그는 “무역파트너들은 글로벌 안보 재원을 더 많이 부담하게 될 것이며, 총수요는 미국에 재분배되고, 미국 납세자는 외국 납세자에게 금리 위험을 재분배할 수 있다”고 적었다. 이같은 마러라고 협정은 트리핀의 딜레마에 몰린 미국이 금융시스템 원칙을 바꾸는 행위라는 점에선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 당시 무역적자가 과도해지면서 금태환을 중지한 것과 비견된다. 21세기 버전의 다자통화협정이라는 측면에선 1985년 독일 일본 등의 통화를 절상하고 달러를 평가절하한 플라자합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다.
관세압박, 100년물 국채 강매 전초전?
문제는 이런 종류의 협약에 과연 다른 나라들이 참여할 것인가다. 동맹국의 팔목을 비틀지 않고 순순히 이런 협약에 참여시킬 방법은 별로 없다. 이를 강제시킬 채찍이자 당근이 관세다. 관세 부담을 줄이고 미국의 안보 우산을 나눠 쓰려면 기축통화 발행 비용을 분담하라는 것이다.경제학자들은 관세의 비용부담이 크다고 지적한다. 물가가 오르고 결국 미국 수입업자와 국민이 비용을 내야 한다는 관점이다. 미란 위원장의 생각은 다르다. 미국이라는 시장을 다른 나라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한, 관세 부담은 미 국민보다 외국에 더 많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트럼프 1기에서 대중 관세를 부과했을 때 달러가치 상승으로 인플레 효과가 상쇄된 경험도 관세 정책의 비용이 생각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전망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미국이 감당할 수 있는 관세율의 적정 수준으로 20%를 제시했다. 현재(2%대)의 열 배 수준까지 관세가 올라가도 미국 경제에 큰 해가 되지 않으리라 봤다.
동맹국이 미국을 ‘벗겨먹고 있다’면서 적국보다 동맹국에게 더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순차적으로 더 높은 관세를 예고함으로써 압박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이 상당히 전략적이라는 얘기다.
보고서는 100년 만기 무이자 채권 외에도 외국 중앙은행에 달러 이용료를 내게 만든다거나, 외국인 투자에 세금을 부과하는 등의 아이디어도 거론하고 있다. 그는 미란 위원장은 최근 블룸버그TV에 출연해서 이 보고서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다양한 옵션을 제시하는 ‘요리법 모음집’”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다자간 통화 협정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트럼프 정부가 “지금은 관세에 집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누가 참여할 것인가
저자 스스로 “브레튼우즈 체제와 그 종말만큼이나 큰 글로벌 시장의 변화를 의미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보고서의 실행 가능성은 여전히 미지수다. 무엇보다도 관세를 이용한 당근과 채찍 전략을 쓴다 해서 주요 동맹국이 이 체제에 흔쾌히 참여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브래드 들롱 미국 UC버클리대 교수는 “거래가 성사되려면 상대가 거래 약속이 지켜질 거라고 생각해야 할 텐데 트럼프 대통령은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매일 확인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을 영구히 지속할 지 확신하기 어려운 것도 문제다.
일방통행식 관세부과와 외교정책으로 국제사회 반발이 커지는 가운데 미국이 글로벌 금융체제 재편을 시도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제국의 지위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다. 위안화나 유로화 등을 중심으로 경제권이 재편되면서 달러의 위상이 되레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제프리 프란켈 하버드대 교수는 이 구상이 로마 제국의 점령지 공물 요구와 유사하다면서 “미국의 자금조달 능력을 해치고 달러의 국제 주요 통화 지위를 위협할 수 있으며, 오히려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쇠퇴를 가속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강달러의 핵심 원인이 누락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의 마틴 울프 칼럼니스트는 달러가 강세를 띠는 원인을 기축통화 수요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면서 미국의 고질적인 저축부족을 한 원인으로 꼽았다. 미국 기업에 대한 투자 규모에 비해 미국인들의 저축이 지나치게 적은 것이 경상수지 불균형, 나아가 (미국으로 투자금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달러 강세를 유발한다는 설명이다. 이를 해소하려면 GDP의 3% 이상에 해당하는 저축률 상승이 필요하나, 미란 보고서는 이런 문제에 관한 언급이 없다고 그는 꼬집었다.
CEA 위원장에 미란 천거한 베선트…청사진 공유
스티븐 미란 미국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은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트럼프 1기 정부에서 재무부 경제정책 자문관을 지냈다. 블룸버그통신은 한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2기 트럼프 정부에서 CEA 위원장 자리에 천거한 사람 중 하나가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이었다고 보도했다. 작년 2월경 베선트 장관이 트럼프 선거 캠페인을 돕기 위해 준비하면서 미란을 찾았고, 두 사람의 의견이 여러 면에서 일치했다는 것이다.두 사람이 비슷한 견해를 보이고 있는 대표적인 분야가 관세정책이다. 베선트 장관은 트럼프 정부 출범 전부터 ‘단계적인 관세 부과’를 강조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장이 적응할 시간을 벌어줄 수 있고, 상대국에 대한 압박의 강도가 더 높아질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서 빠른 협상을 가능하게 한다는 구상이다. 미란 위원장의 생각도 이와 일치한다.
미란 위원장은 또 미국이 궁극적으로 우호적인 국가(동맹국), 중립적인 국가, 비우호적인 국가(적국)를 나눠서 서로 다른 통상·안보 정책을 적용해야 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그는 작년 11월 내놓은 이른바 ‘미란 보고서’에서 트럼프 정부가 달러의 기축통화 부담을 동맹국과 나누는 시나리오를 추진한다면 “우방과 적, 중립적 거래 파트너의 경계가 훨씬 명확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안보 및 경제 우산을 나눠 쓰는 우방국은 더 많은 부담을 져야 하지만 더 유리한 무역 및 통화조건을 누릴 수 있고, 그 밖의 국가들은 관세 및 기타 정책을 통해 공격적인 비용을 부과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베선트 장관도 이런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 이코노미스트지에 기고한 글에서 “안보와 경제를 더 긴밀히 연결해야 한다”면서 “미국의 안보 보장과 시장접근은 동맹국의 안보지출 증가와 경제 구조조정 약속과 연계되어야 하며,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선트 장관과 미란 위원장은 모두 국가가 시장지배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행사함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최적관세율’이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한다. 최적관세율 수준까지는 관세를 부과하더라도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다.
단기적인 미국 중앙은행(Fed)의 정책금리에 손대는 것보다 장기 국채 금리를 낮추는 데 집중하려는 것도 유사하다. 두 사람은 또 재닛 옐런 전 재무장관이 2023년말부터 1년 이하 만기의 단기국채 발행을 늘린 것을 공통적으로 비판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