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과 귓볼에 매달아 오롯이 느끼는 생기로움... 최예진의 '봄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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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홍지수의 공예 완상화사한 봄날, 봄다운 봄이 왔다. 청명 전후로 하늘에서 며칠은 천둥번개치고 비바람이 불더라도, 만삭에 이른 꽃봉오리가 활짝 열리고 마른 나뭇가지 끝까지 초록 물이 솟구치는 일을 더 이상 멈추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4월 청명을 넘어선 봄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가까이 두고 오래 쓸 물건을 만드는 공예가들
좋은 기운을 작품에 담고자 하는 마음 커
봄을 희망의 계절로 여기기 때문에
이를 소재로 한 작업 많아
금속공예가 최예진의
봄꽃 특유의 색감과 질감 이용하여
꿋꿋한 생의에 대한 예찬
논밭을 보며 봄의 여섯 마디를 오롯이 실감하고 절기에 맞는 일을 찾아 하는 시골의 봄에 비해, 보이는 것이 마천루이고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도시인들의 봄은 더디고 무디다. 도회지 사람들은 바깥에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피기 시작하고,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봄나물이 마트 진열대에 올라올 때야 봄이 왔음을 실감한다. 꽃향기 코끝에 어른거리고 살갗에 닿는 온도가 따뜻하면 완연한 봄인가 싶지만, 아마 그때는 이미 봄이 절정을 지나 여름에 성큼 더 가까이 가 있는 늦봄일 거다.
안 그래도 짧아 애달픈 봄이 요즘 더 짧아지고 있다. 한반도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것도 옛말이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청명한 봄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다가 며칠 봄다운 봄인가 싶으면, 곧 무더운 여름이다. 갈수록 짧아져서 아쉬운 화양연화(花樣年華)와 같은 이 봄을 어떻게 온전히 즐길 수 있을까? 봄기운을 물씬 느낄 방법으로 시장에서 냉이와 달래, 고들빼기, 두릅 같은 산채를 사다가 나물로 무쳐 먹을까. 끊어온 쑥으로 떡을 빚고 남은 쑥은 도다리 왕창 넣어 한 솥 봄 국을 끓여 볼까. 산수유꽃, 유채꽃, 벚꽃, 튤립, 수선화 가득 피는 꽃밭 명소를 찾으면 이 봄이 기억날까. 그러나 바쁜 도시인이 봄을 만끽하려 시간을 내서 제철 음식과 명소를 찾아 맘껏 즐기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유독 한국공예에 자연을 소재로 삼는 작업이 많은 것은 한국공예가 뿌리한 전통미술이 자연 친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영향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공예가들은 작품에 개인의 절망이나 고독, 정치·사회적 고발을 담기보다 공예품이란 타인이 가까이 두고 오래 쓸 물건이니 되도록 싱그러운 설렘과 밝은 희망, 따뜻한 온기, 꿋꿋한 생명력 같은 좋은 기운을 담고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유달리 큰 사람들이다. 사계절 중에서 봄은 겨울의 삭막함과 혹독함을 떨쳐내고 드디어 활기찬 에너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희망의 계절이다. 우리 공예에 유독 봄을 소재로 한 작업이 많은 것은 한국 공예가의 태도가 주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여긴다.
작가는 방울꽃, 튤립처럼 동글동글한 형태의 꽃을 선호한다. 곱고 보드라운 파스텔 색채, 둥글둥글하고 봉긋한 화형, 살랑살랑 수면에 바람일 듯 찰랑이는 곡선의 연속은 봄철 식물뿐 아니라 구름, 물결 같은 자연 현상이 공유하는 봄의 언어다. 슈링클스 위에 꽃잎을 스케치하고 색연필, 파스텔 등으로 곱게 색칠해 봄꽃 특유의 색감과 질감, 형태를 재현한다. 이후 열을 가하는 방향, 세기에 따라 슈링클스가 오그라들고 주름지고 뒤틀리는 양상이 다르다. 같은 재료라도 변형의 양상이 달라 같은 것을 만들 수 없는 것이 단점이지만, 원래 ‘다름’이야말로 자연의 속성이니 자연스러운 꽃, 식물의 형상을 만들려는 작가에게는 오히려 ‘똑같을 수 없음’이 강점이 된다.
여기에 정은으로 제작한 고정장치를 붙이면 귀걸이, 브로치 등 예술 장신구가 된다. 작년 봄 인사동 KCDF 윈도우갤러리에서는 예술 장신구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도로 <봄의 조각>이라는 제목하에 작은 덩굴 식물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양지에서 움트는 꽃 피는 싱그러운 봄의 정원을 연출했다. 작가에게 봄의 식물들은 작고 여리고 가냘프지만 순환하는 자연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 존재하고 번식하는 강한 생명력의 표상이다. 정원 양지바른 어느 장소에서도 뿌리내릴 수 있다면, 꽃을 피우고 번식하는 식물의 꿋꿋한 생의를 바라보며 자신이 느꼈던 희열과 생명에 대한 경이를 그는 작은 장신구의 형태, 색감으로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