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형 인간의 사교법…그가 쓴 책을 정성들여 읽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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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18
설지연의 讀說
당신을 알고 싶어서
각계 책 쓴 지인 많아
먼저 다가가진 못해도
그들의 책을 읽으면
만남 이상으로 알게 돼
독서는 궁극의 럭셔리
늘 자기계발에 욕심
에세이·경영서 즐겨 봐
행사·인터뷰 많다보니
일 위해서라도 다독
완벽에 대한 강박
출연진 책 다 읽어야
깊이 있는 질문 가능
해외여행 가기 전엔
관련책 스무권 읽기도
“일관성이라곤 전혀 없이 여러 분야 책이 있어요. 지인이 쓴 책이 많죠. 기자 했다가 방송을 하다 보니 연예인, 운동선수, 기업인, 학자 등 각계에 아는 사람이 많아요. 지인이 낸 책을 챙겨 읽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예요. 제 책장엔 제가 거쳐온 소셜 네트워킹의 궤적이 담겨 있는 셈이죠.”
▷책을 선물 받아도 안 읽게 될 때가 많은데, 다 챙겨 읽는군요.
“제가 내향형 인간이어서 누군가에게 관심, 호감이 있어도 먼저 표현을 잘 못 해요. ‘밥 먹자’고 문자 보내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는 스타일인데,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방법 중 하나가 그가 쓴 책을 읽는 거예요.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어 보면서 상대를 알기 위해 몇 시간을 쏟는 것. 그게 저의 애정 표현이에요. 커피를 몇 번 마시는 것보다 그 사람이 쓴 책을 만났을 때 상대를 더 잘 알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어떤 책을 즐겨 봅니까.
“에세이나 경영서를 즐겨 읽는 편입니다. 성장에 대한 욕구가 큰 편이라 늘 자기 계발에 욕심이 있어요. <엑설런스> <하버드 상위 1퍼센트의 비밀> 같은 책이 떠오르네요. 사실 제가 정말 편할 때 감상에 젖기 위해 책을 읽는 행위는 저한테 ‘궁극의 럭셔리’예요. 책은 일을 위해 읽어야 할 때가 많거든요. 코로나 시기에 일이 줄면서 목적 없이 책을 꽤 읽게 됐어요. 해외 5성급 호텔에서 자는 것보다 호사스러운 경험이었죠. 지금은 윌 곰퍼츠의 <발칙한 현대미술사>를 읽고 있습니다.”
▷최근 인상적으로 읽은 책이 뭔가요.
“제가 정말 ‘샤라웃(shout out)’ 하고 싶은 책이 있어요. 지난 설 연휴에 예정돼 있던 출장이 취소되는 바람에 일정이 붕 뜬 상태에서 혼자 포르투갈에 가게 됐어요. 돈도 못 벌고, 포르투갈은 이미 가봤던 곳이어서 꿀꿀한 거예요. 그래도 뭔가 새로운 게 없을까 하고 용산도서관에서 포르투갈과 관련된 책을 스무 권 넘게 빌렸어요. 그중 한 권의 책이 너무 위대해서 꼭 소개하고 싶었어요. <포르투갈은 블루다>라는 책입니다. 꽤 두꺼운데 여행지에서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계속 넘겨봤어요. 나중엔 책이 닳아서 반납할 때 도서관에 약간 미안할 정도였죠.”
▷어떤 책인지 궁금하네요.
“얼핏 여행책 같지만 인문학 서적입니다. 책을 쓴 조용준 작가는 신문기자 출신이에요. 주간지 편집장까지 지내고, 45세 전에 ‘내 책’을 쓰겠다며 은퇴했다고 해요. 이분은 도자기에 관한 책을 7권이나 쓴 도자기 전문가예요. 유럽, 일본 도자기 여행책을 시리즈로 냈죠. 도자기에 대해 방대한 지식을 갖추려면 도자기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등 역사를 알아야 할 거잖아요. 도자기는 항로가 개척되면서 이동했고, 더구나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연 나라죠. 저자는 도자기를 좇다 보니 세계사를 꿰뚫게 된 거예요. 이 책은 감동 그 자체예요. 출판사에 전화할 뻔했어요. ‘이렇게 좋은 책을 세상에 내주셔서 감사하다’고요.”
▷그 책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나요.
“취재력이요. 그냥 ‘나 한 번 갔다 왔어’가 아니라 엄청난 취재가 돋보이는 방대한 리서치. 포르투갈에 ‘왕비의 도시’로 불리는 오비두스란 곳이 있어요. 보통은 아기자기한 상점을 걷고 유명하다는 체리주를 마시고 사진을 찍고 오기 마련이죠. 작가는 그 조그만 마을의 소박한 박물관에 들러 조각과 도자기에 관해 취재해 썼어요. 누가 왜 만들었는지, 어디에서 발견됐는지 …. 책의 어떤 페이지엔 ‘아무리 찾아봐도 이 기록은 나오지 않았다’는 문장도 있어요. ‘확인했지만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라는 것도 취재의 결과물이잖아요. 쓰는 데 300년은 걸렸을 것 같은 책이에요.”
▷여행을 위해 스무 권 이상 책을 읽었다는 것도 놀라운데요.
“‘완벽’에 대한 강박이 조금 있어요. 콘퍼런스, 인터뷰 같은 행사 진행·통역을 맡으면 출연진의 책을 다 읽어야 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무대 위에서 토크를 나눌 상대의 책을 안 읽고 가서 당황스러운 순간이 오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이 있어요. 책을 읽어야 더 깊은 질문이 나오고, 진부하지 않은 질문을 던졌을 때 답하는 이의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게 보여요. 관중은 모를 수 있어도 인터뷰이는 알아보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좋아했다고 들었는데, 영어에 매료된 최초의 책을 기억합니까.
“<빨강머리 앤> 원서를 막 밑줄 치면서 닳도록 읽었어요. 12~13세 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스토리와 머릿속에 펼쳐지는 전원 풍경, 등장인물의 대화도 너무 좋았지만, 저는 그때부터 문장을 사랑했어요. 책과 사랑에 빠지는 경우는 잘 없는 것 같은데, 문장과 사랑에 빠질 때는 있는 것 같아요.”
▷<빨강머리 앤>의 어떤 문장을 그렇게 사랑했나요.
“처음 보는 문장이 가득 들어 있었고 그게 너무 좋았어요. 주인공이 극단적인 최상급 표현도 많이 쓰거든요. 예쁘고 귀엽고 순수한 표현이 많아요. ‘The little birds sang as if it were the one day of summer in all the year.’(작은 새들은 오늘이 일년 중 유일한 여름날인 것처럼 노래했다.), ‘Anne felt that life was really not worth living without puffed sleeves.’(앤은 인생이 퍼프 소매 없이는 정말로 살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이런 문장에 줄 치고 별표를 하고, 스마일 표시도 해놨더라고요.”
▷마음고생을 하거나 힘들 때 도움이 된 책이 혹시 있습니까.
“내면 세계, 마음 공부에 입문이 된 책 한 권을 얘기하고 싶네요. 류시화 시인이 쓴 <지구별 여행자>입니다. 고등학생 때 침대맡에 끼고 살았어요. 인도식 생각 방식을 담은 짧은 글과 일러스트가 있는, 무겁지 않은 책이에요. 돌이켜보니 제게 작은 숨구멍이 돼 준 책 같아요. 주변은 입시 경쟁으로 한창인데 제 안에선 희한하게 바깥 소음에서 약간 거리를 두는 마음이 생겼거든요. 그때부터 인생이 별거 없다는 걸 알았던 것 같기도 해요. 삶을 관망하는 자세를 갖게 됐달까요. 나중에 기자가 되고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책을 읽다가 인도에 갔어요. 결국 저는 어떤 본질, 내면 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책 <행복의 기원>의 마지막 페이지를 꼽을게요. ‘행복의 핵심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의 내용과 지금까지의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총체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것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다. 문명에 묻혀 살지만, 우리의 원시적인 뇌가 여전히 가장 흥분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다. 음식, 그리고 사람.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모든 껍데기를 벗겨내면 행복은 결국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요약된다.’”
설지연 기자 sjy@www5s.sh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