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산업 대전환기의 나침반 전략
“세계 무역 흐름과 러시아의 값싼 에너지에 기댄 지난 25년간의 성장 모델은 끝났다. 이제 기어를 바꿔야 할 때다.”

유럽연합(EU) 2기를 맡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지난주 다보스포럼에서 이같이 고백했을 때는 뒤늦은 자성 정도로 여겼다. ‘레드 테이프(red tape)’로 대변되는 유럽의 만성적 관료주의와 규제정책은 유럽을 쪼그라든 옛 제국들의 연합체로 전락시켰다. 2000년대 초반 미국과 맞먹던 EU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2023년 기준 64%(16조달러)에 불과하다. 미국의 60% 수준인 연구개발(R&D) 투자로 유니콘 기업은 미국(760개)의 절반 수준인 390개에 그치고 있다. 폭스바겐그룹 등 전통의 굴뚝산업 강자들도 위기를 맞고 있다. 전문가들은 과속 탈탄소전략 등의 규제정책과 경직된 노동시장을 위기의 핵심 원인으로 진단한다.

지난 29일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이 발표한 ‘경쟁력 나침반’ 정책은 이 같은 유럽의 조바심을 반영한다. 미국에 뒤처진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인공지능(AI) 분야의 신흥기업 육성과 전통 굴뚝산업을 재편하는 5개년 로드맵이다. 무엇보다 전례 없는 수준의 규제 간소화를 위한 옴니버스 규정이 눈길을 끈다. 회원국별로 제각각인 규제에 어려움을 호소해온 업계의 의견을 반영해 노동법 파산법 세법 등을 통합, 간소화하는 단일 법률 체계를 마련하기로 한 것. 이를 통해 기업 행정 부담을 25~35% 줄이겠다는 구체적인 목표까지 제시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정부의 등장은 연초부터 글로벌 시장에 ‘나비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출범과 동시에 몰아치는 자국 우선주의 정책은 관료주의적 규제정책에 함몰된 유럽 대륙까지 일깨우고 있다. 특히 오픈AI, 오라클, 소프트뱅크 등과 4년간 5000억달러(약 720조원)를 투입해 미국판 AI 만리장성을 쌓겠다는 트럼프 정부의 ‘스타게이트’ 구상은 세계 산업계의 이목을 끌었다. 자금 조달 역을 맡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반도체기업 Arm을 보유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2016년 320억달러에 지분 90%를 사들인 Arm의 현재 기업가치는 500억달러를 넘었다. 내년부터 자체 AI 칩을 통해 스타게이트 구축의 주요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TSMC의 일본 구마모토 반도체 공장 건립에 이어 스타게이트 편승을 통해 일본이 ‘사무라이 반도체’의 부활을 꾀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전망도 나온다.

중국 스타트업이 최근 공개한 AI ‘딥시크(deep seek)’는 글로벌 기술산업 시장에 또 다른 충격파를 안겼다. 챗GPT의 10분의 1 비용으로 비슷한 연산 및 추론 능력을 구현한 데다 무엇보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를 뚫고 이런 결과를 끌어냈다는 점이 파장을 낳고 있다. 딥시크는 엔비디아의 최신 고성능 칩(H100)이 아니라 저성능 반도체를 활용한 ‘가성비’ AI 모델이다. 미국 주도의 고비용 AI 만리장성 전략 구축이 여의치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초부터 전개되는 세계 주요 국가의 각축전이 예사롭지 않다. 미국의 질주와 이에 편승해 반도체 권토중래를 노리는 일본, 굼뜨던 유럽의 과감한 규제 혁파 시도 그리고 미국의 AI 장벽을 뚫으려는 중국 등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볼 수 없는 움직임이다. 이에 비해 반도체특별법 하나를 두고도 허송세월하는 한국의 모습은 너무나 여유롭다. 이제라도 AI 등 미래산업을 위한 규제 혁파 로드맵을 마련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고유의 제조 경쟁력을 들이밀 공간을 찾아내야 한다. 미래산업의 주도권을 둘러싼 각축의 장에서는 제조업 마인드보다 한발 앞선 기민함이 절실하다. ‘변방으로 밀려날 수 없다’는 절박함 가득한 나침반 전략을 서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