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귀촌은 옛말…'뉴욕·피렌체 한달 살기' 인기
3년 전 직장에서 은퇴한 이상재 씨(61)는 지난달 초 프랑스 파리 제16구역으로 ‘한 달 살기’ 여행을 떠났다. 이곳은 파리 중심부에서 8㎞가량 떨어진 조용한 교외 지역이지만 지하철 등 대중교통 시설이 잘 갖춰졌다. 월 200만원대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공유 숙소 주거비용도 장점. 이씨는 “은퇴 직후 떠난 제주 한 달 살기에 이어 두 번째 장기 여행”이라며 “1000만원 넘게 썼지만 ‘경험을 샀다’는 생각에 한 푼도 아깝지 않다”고 했다.

이상재 씨가 본인 블로그 ‘은소랜 은퇴연구소’에 올린 파리 한 달 살기 관련 사진.  독자 제공
이상재 씨가 본인 블로그 ‘은소랜 은퇴연구소’에 올린 파리 한 달 살기 관련 사진. 독자 제공
해외여행을 즐기는 ‘파워 시니어’가 늘고 있다. 주머니가 두둑한 파워 시니어 은퇴자가 2030세대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인다는 분석이 나온다.

23일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61세 이상 해외 출국자는 403만5454명으로 2023년 306만4462명 대비 31.6% 늘었다. 코로나19 직전인 2018년 출국자 수(298만5218명)도 뛰어넘었다.

여행업계 관계자들은 특히 한 달 살기, 일 년 살기 등 장기 해외여행을 선택하는 시니어가 많아졌다고 설명한다. 이들을 겨냥한 한 달 살기 여행 상품도 발 빠르게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말레이시아에서 한 달 살기’ 상품을 출시한 교원라이프 관계자는 “은퇴 후에도 자기계발과 여가 활동에 적극적인 파워 시니어를 겨냥해 여행과 교육, 문화 체험을 모두 즐길 수 있는 상품을 업계 최초로 개발했다”며 “한 달 패키지 상품인 만큼 가격대가 비싼 편인데도 문의가 꾸준히 들어온다”고 했다.

은퇴자들은 장기 해외여행이 시골 전원생활을 일부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해외여행을 다수 경험한 중장년층이 늘어난 것도 해외 장기 체류가 증가한 요인으로 거론된다. 올해 은퇴를 앞둔 김모씨(60)는 “당초 막연하게 전원생활을 꿈꿨는데 최근 유튜브에서 해외 장기 생활 관련 동영상을 본 후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 피렌체 교외에서 한 달 살기 프로젝트를 세우고 있다”며 “모아 놓은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기보다 ‘인생 제2막’을 위해 나에게 아낌없이 투자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시골 전원생활과 비교하면 주택 구입 등으로 목돈이 들어갈 필요도 없다. 일부 해외 국가에선 국내보다 생활비가 더 저렴한 사례도 많다. 여행업계 관계자는 “주요 한 달 살기 여행지인 태국 치앙마이, 말레이시아 등 물가가 저렴한 일부 동남아시아 국가는 월 100만~200만원의 생활비만 있어도 새로운 경험을 즐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관련 업계는 파워 시니어의 은퇴 후 생활 패턴이 시장에 미칠 영향을 주목하고 있다. 일각에선 국내 여행·관광산업, 귀농·귀촌 지역의 경제가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제주도는 상대적으로 비싼 생활비용 등으로 유입 인구가 줄어들면서 부동산 시장이 가라앉고 있다.

박근영 협성대 호텔관광경영학과 교수는 “개성을 중시하는 파워 시니어가 국내외 1박2일 패키지여행이나 귀농·귀촌보다 해외 장기 여행을 선호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며 “이런 추세가 확산하면 제주, 경북 경주 등 국내 관광지가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안정훈/정희원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