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25주년 맞은 뮤지컬 '베르테르'
조광화 연출·구소영 음악감독 인터뷰
"꿈 속에 나온 해바라기에서 콘셉트 착안"
"시대 관통하는 캐릭터가 고전의 매력"
"요즘 사람들은 사랑 앞에서 너무 조심스러운 것 같아요. 내 안에서 열정이 피어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지', '스토커로 비칠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거죠. 하지만 예술 세계에서만큼은 그런 불안을 내려놓고, 내 열정과 욕망의 끝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습니다."
25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 카페에서 조광화 베르테르 뮤지컬 연출가(왼쪽)와 구소영 베르테르 뮤지컬 음악감독이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임형택 기자
26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만난 뮤지컬 베르테르의 연출가 조광화 감독은 주인공 베르테르만큼이나 뜨겁게, 사랑에 대한 지론을 펼쳤다. 그는 "늘 베르테르에게 이입하다가 감정선이 너무 힘들어 이제는 알베르트(롯데의 약혼자)이고 싶기도 했는데 일하면서 다시 베르테르가 되더라"며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베르테르 초창기부터 호흡을 맞춘 조 감독과 구소영 협력연출 겸 음악감독에게 베르테르의 변천사와 고전 뮤지컬의 매력을 들어봤다. 베르테르는 다음 달 16일을 끝으로 올해 무대를 마친다.
올해 창작 25주년을 맞은 베르테르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장수 뮤지컬이다. 현재 연극계 스타 연출가 겸 극작가인 고선웅 서울시극단장이 독일 대문호 괴테가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무대 언어로 각색했다. 약혼자가 있는 롯데를 향한 베르테르의 순수하고 애절한 사랑에 매료된 관객들은 공연을 수차례 반복 관람하며 이른바 '회전문 관객'이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다. 조 감독은 고전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 여전히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에 대해 "세상 사는 모습이 아무리 제각각이라 해도, 성격의 전형성이라는 게 있다"며 "시대가 바뀌고 트렌드가 달라져도 어떤 상황을 보자마자 누구나 바로 반응할 수 있는 캐릭터가 고전 속에 있다"고 말했다.
베르테르는 2002년 재정적 문제로 재연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지만 국내 최초 뮤지컬 동호회인 '베사모(베르테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금에 나서 2003년 재연을 성사시켰다. 첫 프로덕션부터 작품에 참여한 구 감독은 "크라우드 펀딩 문화가 없었을 때였는데 자칫 날릴 수도 있는 돈을 기꺼이 모금해주셔서 정말 축복받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조광화 베르테르 뮤지컬 연출가가 25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 카페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임형택 기자
그렇게 무대에 안착한 베르테르는 세월을 거치며 많은 변화를 겪었다. 베르테르를 대표하는 꽃이 2013년 붉은 장미에서 노란 해바라기로 바뀐 게 대표적이다. 당시 조 감독은 만족스러운 엔딩 장면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꿈에서 펼쳐진 해바라기 꽃밭에서 해답을 찾았다. 조 감독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 반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와 어긋나는 운명을 다룬 소피아 로렌 출연의 영화 해바라기가 베르테르와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며 "해바라기를 다 쓰러뜨리자는 정승호 무대 디자이너의 아이디어까지 더해져 현재의 마지막 장면을 만들 수 있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베르테르의 극단적 선택을 쓰러지는 해바라기에 비유한 엔딩은 관객들이 극찬하는 장면 중 하나다.
올해 25주년을 맞은 뮤지컬 '베르테르'의 한 장면/사진=CJ ENM
베르테르는 손이 많이 가는 작품이다. 관객들이 주인공들에게 공감해야 하는데 배우들의 미묘한 연기 톤 변화에도 흐름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구 감독은 지휘는 물론 피아노까지 직접 연주한다. 사실상 숨소리를 큐사인 삼아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셈이다. 그는 "일부 객석에서는 제가 피아노를 치며 연주자들과 호흡하는 모습이 보인다"며 잘 알려지지 않은 관람 팁을 공유했다. 구 감독이 가장 아끼는 넘버(뮤지컬 속 노래)는 '발길을 뗄 수 없으면'이라고 한다.
구소영 베르테르 뮤지컬 음악감독이 25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 카페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임형택 기자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쳐나는 요즘, 서정성이 강한 베르테르가 갖는 의미는 뭘까. 조 감독은 이렇게 설명했다. "베르테르는 열정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캡사이신을 먹었을 때와 같은 흥분감에 길들여진 것 같아요. 하지만 결국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자연에서 익은 태양초 고추이지 않겠어요? 한 관객의 표현을 빌리자면 베르테르는 '잔잔한 도파민'을 뿜어내는 뮤지컬입니다."
두 창작진은 베르테르를 30년 이상 공연하기 위해 새로운 연출도 구상하고 있다. 해바라기 등 핵심 콘셉트는 그대로 두되, 롯데와 베르테르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더욱 섬세하게 표현될 수 있도록 다양한 연출적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조 감독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 관객들이 작품을 좀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고민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뮤지컬 베르테르 25주년 기념공연 포스터/사진=CJ ENM
베르테르는 현재 사랑에 푹 빠졌거나, 한때 뜨거운 사랑을 했던 사실상 모든 이를 위한 작품이다. 조 감독은 "삶이 무료한 분들, 열정을 잃어버린 분들이 보면 좋은 뮤지컬"이라며 "비록 유치하고 위험할망정 한번 뜨거워져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고 말했다. 구 감독도 보탰다. "극중 펍 주인 오르카가 부르는 넘버에 이런 가사가 나와요. '나도 왕년에는 뜨거운 사랑했었지'라고 말이에요. 우리 모두 그런 시절이 있었잖아요. 지금은 무모하게 내 전부를 걸 만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없는 자신도 보고요. 하지만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에요. 베르테르를 보며 가장 뜨거웠던 때의 나를 추억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