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 여자가 집을 나갔다. 어느 막장 드라마 속 이야기인가. 2025년 2월 재개봉한 <아이 엠 러브>(2009)는 이탈리아의 화려한 상류층 가문의 안주인으로 살아온 주인공 '엠마'가 요리사인 아들의 친구 '안토니오'에게 매혹되어 모든 것을 저버리는 내용이다. <비거 스플래쉬>(2015),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으로 이어지는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 감독의 욕망 3부작의 시작으로, 국내에서는 2018년에 이어 벌써 두 번째 재개봉이다. 여성의 욕망을 그린다는 점에서 드라마 자체는 그리 참신하진 않다. 게다가 OTT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다. 그렇다면 굳이 극장으로 갈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아이 엠 러브>는 극장에서 볼 때, 다시 말해 영화적으로 체험할 때 분명 더 빛나는 작품이다.
영화 <아이 엠 러브>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아이 엠 러브>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왜냐하면 <아이 엠 러브>의 매력은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적 표현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영화란 무엇인가. 여기엔 여러 답을 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핵심이 영화적 표현, 즉 이미지와 사운드의 예술적 조합이라는 점이다. 이야기를 영상과 소리라는 영화적 언어로 어떻게 표현하는가 이것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 <아이 엠 러브>를 다시 볼 이유는 여기에 있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영상과 불안정한 인물의 심리 변화를 꿰뚫는 듯한 음악의 조합,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우리는 극장으로 가야 한다.

이탈리아의 전통과 명망 있는 가문, 수려한 외모에 교양있는 가족들, 예술 작품과 고가구가 가득한 저택에선 수시로 만찬과 파티가 열리며, 시아버지에서 남편 그리고 아들로 이어질 탄탄한 사업, 그 속에서 우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인이 엠마다. 그러나 이 완벽한 가정환경을 구아다니노 감독은 조금 다르게 영화적으로 표현한다.

엠마가 사는 밀라노는 회색빛 생기 잃은 도시로 그려진다. 겨울에 내리는 눈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고, 활력이나 인간미는 느껴지지 않으며, 도시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위압감을 준다. 저택도 마찬가지다. 오래된 명화 액자는 그녀를 압도하고, 고가구와 수없이 많은 저택의 문들은 그녀를 여러 겹으로 가둬둔다. 그 안에서 가족 모임의 음식을 준비하고 드레스를 차려입는 그녀의 모습에선 즐거움보다 집안 전통과 형식을 실수 없이 실행하려는 견고함이 느껴진다. 즉, 밀라노와 저택에 그녀는 갇혀있다.
영화 <아이 엠 러브> 스틸컷 / 출처. IMDb
영화 <아이 엠 러브> 스틸컷 / 출처. IMDb
한편 안토니오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다. 스포츠 경기에선 가문의 장남 ‘에도’에게 패배를 안겨준 인물이자, 색다른 식자재를 조합한 음식으로 에도의 입맛마저 사로잡은 인물이다. 아들의 호평에 엠마는 안토니오의 음식을 맛보게 된다. 이후 그녀는 그의 음식, 그리고 그에게 강렬하게 이끌린다.

강조하자면 엠마가 처음 매혹된 것은 안토니오라는 연하의 남자가 아니라 그의 음식이다. 왜 음식이었을까. 음식은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매혹의 대상이자, 개인과 사회의 역사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도구다. 엠마는 그의 음식에 이끌렸고, 그의 공간에 매혹되었으며, 그와 사랑을 나눈다.
영화 <아이 엠 러브>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아이 엠 러브>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이후 엠마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한다. 러시아인이지만 남편을 만난 뒤 이탈리아로 와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게 되었고, 고향이 그리우면 가끔 전통 요리를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 요리법도 안토니오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엠마란 이름은 남편이 지어준 것으로, 어릴 적 집에선 '키티쉬'로 불렸다고 말한다. "키티쉬." 이탈리아에서 엠마를 그 이름으로 불러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안토니오이고, 그의 곁에서 엠마는 본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감독은 안토니오의 공간을 밀라노의 저택과 완전히 대비되게 묘사한다.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인적이 드문 깊은 산중 허름한 건물,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새소리가 들리는 공간이 안토니오의 시골 거처다. 이곳에선 값비싼 드레스와 가방, 가문의 안주인으로 누구의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역할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저 먼 산 능선을 보고 풀 내음, 새소리, 바람을 느끼면 된다. 엠마와 안토니오의 정사 장면도 선정적이라기보다 자연과 어우러지게 표현되었다. 이름 모를 풀과 꽃, 벌레의 클로즈업 이미지와 사랑을 나누는 두 남녀의 손, 허리, 목덜미, 가슴이 교차한다. 엠마는 안토니오의 요리, 그와 나누는 사랑, 그리고 대자연 속에서 자신을 되찾는다.
영화 <아이 엠 러브>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아이 엠 러브>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가문의 전통을 누구보다 지키려 했던 아들 에도가 사망하고 에도의 아이가 태어나려는 그 순간, 엠마는 집에서 나간다. 그간 자신을 감싸던 멋진 옷과 장신구를 모두 버리고 허름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사라진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 저택의 열린 현관문만이 가문의 마지막 이미지로 남는다. 이제 <아이 엠 러브>는 비윤리적 사랑에 빠진 여성의 이야기라기보다 자신을 찾아 떠난 여성의 이야기로 읽힌다. 갇힌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으려는 인물, 이 익숙한 이야기를 갇힘과 열림의 매혹적인 영상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영화가 <아이 엠 러브>다.

김은정 영화평론가

[영화 <아이 엠 러브> 재개봉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