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창과 오케스트라가 빚어낸 창작 합창 음악극
국립합창단 3·1절 기념 음악회 <거룩한 함성>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국립합창단의 3.1절 기념음악회에서 합창 음악극 <거룩한 함성>이 초연됐다.
‘합창 음악극’은 20세기 미국에서 시작된 장르다. 주로 종교음악에서 쓰였던 합창의 역할이 발전돼 극의 중심을 이끌어간다. 일반적인 20세기 오페라나 뮤지컬이 독창과 연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면, 합창 음악극은 합창단이 배경과 서사를 제시하며 극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국립합창단은 이를 한국적 정서와 역사적 소재를 접목해 독창적으로 풀어냈다.
극중 어린이 합창단과 정옥분이 희망에 찬 노래를 하는 장면 / ⓒ황필주
국립합창단은 3.1운동을 소재로 한 창작 합창극 <나의 나라>, 한글날을 맞아 발표한 <훈민정음>을 발표하며 우리의 역사를 담은 합창 음악 창작에 꾸준한 의지를 보여왔다.
3.1절을 맞아 발표된 <거룩한 함성>은 일제강점기 위안부 피해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으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한 편의 음악극으로 기록한 의미 있는 시도였다.
지휘자가 무대에 오르자 팀파니의 강렬한 타격음이 공연의 서막을 알렸다. 제1곡 <이제 소설도 한류>는 "우리의 자랑, 영광의 소식"이라는 가사를 통해 대한민국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해 문화 강국으로 한발 더 도약한 사실을 알리며 시작했다. 이어 소설가 최강산 역의 배우 차인표와 그의 딸 최은서 역의 배우 김혜령이 무대에 등장했다.
배우 차인표와 배우 김혜령 / ⓒ황필주
공연은 여주인공 정옥분의 삶을 중심으로 크게 3부로 구성됐다. 1부는 평안남도 출신의 15세 소녀 정옥분이 정혼자 강산을 만나는 이야기다. 강산이 독립운동을 위해 떠나는 장면을 희망적인 선율로 그려냈다. 그러나 2부에서는 불규칙한 리듬과 불안한 불협화음을 통해 정옥분과 소녀들이 만주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가는 순간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정옥분 역 소프라노 조선형 / ⓒ황필주
3부에서는 해방 후 정옥분이 조국이 아닌 하와이로 떠나 전쟁고아 철수를 입양해 키우며, 과거의 상처를 견디고 삶을 이어가는 모습을 담았다. 손자 최강산이 위기에 처한 할머니를 부르며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이 만나는 장면은 아픈 역사를 몸소 견뎌온 우리 조부모들의 희생을 떠오르게 하며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극중 소설가 최강산과 정옥분이 만나는 장면 / ⓒ황필주
이번 작품은 국립합창단 위촉 작곡가 김민아가 음악을 쓰고, 오페라 연출가 김숙영이 대본과 연출을 맡았다. 작곡가는 뮤지컬적인 요소와 한국적 정서가 깃든 멜로디를 활용해 관객의 감정 이입을 유도했다. 특히 극 후반부에 어린이합창단이 부른 제13곡 <내 할머니의 이야기>는 실제로 독립운동을 떠난 후 돌아오지 않은 오빠를 그리워하며 최순애가 쓴 시에 박태준이 곡을 붙인 동요 <오빠생각>(1925)의 멜로디를 인용해 연주했다. 익숙한 선율과 작품의 서사가 맞물리며, 객석 곳곳에서 눈물을 훔치는 관객들이 눈에 띄었다.
극중 정옥분과 최강산이 만나는 장면 / ⓒ황필주
정옥분 역을 맡은 소프라노 조선형은 순박한 시골 소녀에서 위안부 피해자로 절규하는 여성, 그리고 하와이에서 독립을 기리며 살아가는 노년의 정옥분까지 한 무대에서 삶의 흐름을 성량과 감정의 변화로 표현해냈다. 그녀의 섬세한 가창력과 깊이 있는 연기는 관객들이 작품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최강산 역을 연기한 배우 차인표는 특유의 전달력 있는 목소리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가 있다"라는 대사를 강렬하게 전하며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제 14곡 거룩한 함성에 이어 앙코르를 부르는 장면 / ⓒ황필주
마지막으로 53인조 합창단과 47인조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그리고 모든 출연진이 무대 앞으로 나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제14곡 <거룩한 함성>을 부르는 장면에서는 공연장이 감동으로 가득 찼다. 공연이 끝난 후 7분간 이어진 박수와 환호는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얼마나 깊은 감동을 줬는지 보여줬다.
커튼콜을 마친 후 국립합창단의 민인기 단장은 마이크를 들고 "국립합창단과 국립심포니 등 국립 예술단체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예술단체로서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연주를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장을 찾은 한 관객은 "작품이 꼭 재공연되길 바란다. 한국 음악가들의 손에서 창작된 작품이 단발성 공연으로 끝난다면 너무 아쉬울 것"이라는 소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