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물 美국채, 동맹국에 강매하자"…'황당 아이디어' 현실화될까
최근 세계 경제의 화두 중 하나는 ‘미란 보고서’다. 스티븐 미란 미국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이 작년 11월 대통령 선거 이후 투자자문사 허드슨베이캐피털 소속 매크로 전략담당자 자격으로 발표한 ‘글로벌 무역시스템 재구성 사용자 가이드’다. 41쪽 분량이다.

보고서는 발간 즉시 ‘대담함’으로 화제를 모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구축한 세계 금융질서를 완전히 새로 짜는 구상을 담고 있어서다. 보고서는 구조적인 강달러를 해소하면서도 달러의 세계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동맹국과 비용을 분담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동맹국 압박을 위해 관세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도 제시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초만 해도 미란 보고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다” “황당하다”고 평가받았다. 지금은 다르다. 지난 두 달 동안 트럼프 정부가 추진해 온 관세 정책을 비롯해 다소 모호해 보이는 경제·통상·외교전략에 의미를 부여하고 트럼프 정부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보고서로 인식되고 있다.

“국제 환율 관리 시스템 재창조”

미란 보고서는 미국의 제조업 부진 원인을 구조적인 강달러에서 찾는다. 기축통화 노릇을 하느라 달러화 수요가 과도하게 증가했으며 이로 인해 “미국 수출품의 경쟁력은 떨어지고 수입품은 싸져 미국 제조업이 손해를 보는” 상황이 됐다고 분석했다. 이 결과 미국 제조업이 쇠퇴하고 미국인들은 정부 지원금에 의존하거나 마약에 중독된다고 진단했다.

일반적으로는 무역적자와 재정적자가 많은 나라는 통화가치가 낮아지고 그 결과 수출이 늘어나며 균형을 찾는 시스템이 작동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 전 세계에 준비자산인 달러를 제공하기 때문에 무역적자와 재정적자가 아무리 커져도 미국 달러와 국채 수요가 존재한다. 미국의 수출품은 다른 나라처럼 비행기, 자동차가 아니다. 미국 국채다. 미국 경제는 다른 나라에 국채를 팔고(수출) 그 대가로 다른 나라의 상품을 받아들임(수입)으로써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감당해야 하는 딜레마(트리핀의 딜레마)에 처해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60년대 40%에서 지난해 26%까지 낮아졌다. 이 기간 유로화와 위안화 등 다른 통화의 사용 비중이 늘긴 했지만 여전히 달러의 위상은 압도적이다. 보고서는 “세계 GDP 대비 미국의 비중이 축소되면 전 세계 무역과 저축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이 감당해야 하는 적자 규모가 커진다”며 “세계의 성장이 미국 수출에 주는 고통이 증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이런 진단을 바탕으로 환율 관리 시스템 자체를 재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글로벌 준비통화로서 달러 사용을 끝내는 대신 다른 국가들이 우리의 준비금 제공을 통해 받는 혜택의 일부를 되찾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달러 약세와 기축통화국 동시 추구

미란 보고서가 추구하는 목표는 크게 세 가지다. 구조적인 강달러를 해소하고, 미국 제조업을 부흥시키며, 동시에 미국의 기축통화국 및 패권국 위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역대 미국 정부가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은 세 가지 목표가 상충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축통화 공급국이 자국 통화의 약세를 추구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값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물건을 사는 사람은 없다.

미란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소비시장의 위상과 안보 리더십을 활용해 동맹국에 이 부담을 공동으로 지우면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한 ‘글로벌 딜’로 ‘마러라고 협정’을 제안했다. 마러라고는 트럼프 대통령 별장이 있는 곳이다. 구체적으로 외국이 보유한 달러 자산을 영구채로 전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예컨대 세계 각국은 준비자산으로 미 국채를 다량 보유하고 있는데 대부분 만기가 10년 이하다. 이를 100년 만기 국채나 만기가 없는 영구채로 전환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초장기 국채는 거의 무이자로 발행하는 게 핵심이다. 동맹국이 영구채 등을 무이자로 매입한다면 미국은 이자 부담 없이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기업이 무상으로 자본 투자를 받는 것과 비슷하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각국 중앙은행이 일정 수준의 무역대금을 초과하는 달러를 매각하고 자국 통화를 매입하도록 요구한다. 이렇게 하면 달러 약세를 유도할 수 있다. 이런 협정은 트리핀의 딜레마에 몰린 미국이 세계 금융 시스템의 원칙을 바꾸는 행위란 점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1971년 금태환 중지와 ‘제2의 플라자 합의’에 비견된다. 미국은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독일 일본 등의 통화를 절상하고 달러를 평가절하했다.

관세 전쟁은 환율 전쟁의 전초전?

문제는 이런 종류의 협약에 과연 다른 나라들이 참여할 것이냐다. 동맹국이 거부할 가능성이 큰데 이를 실행하기 위한 채찍이자 당근이 바로 관세와 미국의 안보 우산이다. 관세 부담을 줄이고 미국의 안전 보장을 받으려면 기축통화 발행 비용을 분담하라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관세의 비용 부담이 크다고 지적한다. 물가가 오르고 결국 미국 수입업자와 국민이 비용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미란의 생각은 다르다. 미국이라는 시장을 다른 나라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한 관세 부담은 궁극적으로 외국이 더 지게 될 것이란 시각이다. 트럼프 1기 때 중국에 관세를 부과했을 때 달러가치가 상승하면서 인플레 효과가 상쇄된 경험도 있다.

미란은 보고서에서 미국이 감당할 수 있는 적정 관세율을 20%로 제시했다. 미국의 평균 관세율은 현재 2%대다. 이보다 열 배 수준까지 관세가 올라도 미국 경제에 큰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란 보고서의 관점에서 보면 동맹을 향해 “미국을 벗겨 먹고 있다”고 비판하며 세계 각국을 상대로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압박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은 전략적 행보로 볼 수 있다. 보고서는 100년 만기 무이자 채권 외에 외국 중앙은행에 달러 이용료를 내게 한다거나 외국인 투자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등의 아이디어도 거론했다. 미란 위원장은 최근 블룸버그TV에 출연해 이 보고서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다양한 옵션을 제시하는 ‘요리법 모음집’”이라고 묘사했다.

동맹국 참여 가능성은 불투명

보고서가 실제 실행될지는 미지수다. 미란 위원장 스스로 보고서가 실행되면 “브레턴우즈 체제와 그 종말만큼이나 큰 글로벌 시장의 변화를 의미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관세를 이용한 당근과 채찍 전략으로 동맹국이 비용 분담에 흔쾌히 동의할지 장담할 수 없다. 브래드 들롱 미국 UC버클리 교수는 “거래가 성사되려면 상대가 거래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텐데 트럼프 대통령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가 매일 확인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정권 이후에도 이런 정책 기조가 지속될지 확신하기도 어렵다. 위안화나 유로화 등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블록 재편을 자극해 미국의 제국으로서의 지위가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

강달러의 핵심 원인이 누락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마틴 울프 파이낸셜타임스(FT) 칼럼니스트는 달러 강세의 원인을 기축통화 수요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며 미국의 고질적인 저축 부족을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저축 부족, 즉 미국의 과잉 소비로 무역적자가 늘어나며 미국 내 부족한 투자 재원을 해외에서 유입되는 자금으로 메우는 과정에서 달러 강세가 유발된다는 것이다. 미국인의 저축이 늘어야 달러 강세가 누그러지는데 미란 보고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미란 보고서

지난해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 직후 스티븐 미란 허드슨베이캐피털 전략담당자가 쓴 41쪽 분량의 보고서. 이후 미란이 백악관 수석경제학자로 불리는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에 기용되며 도널드 트럼프 2기 관세 정책과 세계 경제 질서 재편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보고서로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