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을 두고 정지용은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했다. 백석은 “자다가도 일어나 가고 싶은 곳”, 박경리는 “조선의 나폴리”로 불렀다. 김춘수, 유치환, 이중섭, 전혁림도 머물며 예술혼을 키운 곳이 통영이다. 이곳에서 음악제만 즐기면 반쪽짜리 여행이다. 예술가들의 흔적을 보며 영감을 얻어갈 만한 장소를 추렸다.

충렬사 돌계단은 백석이 첫사랑을 묻어둔 곳이다. 키 183㎝의 모던보이였던 그는 통영 처녀 ‘란’에게 사랑에 빠진다. 그녀를 만나러 통영에 오길 수차례. 그는 란의 부모에게 인사를 겸한 청혼을 하지만 그녀를 보지도 못하고 결혼 승낙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란을 소개해준 친구가 “백석의 어머니는 기생 출신”이라고 말하면서 훼방을 놓은 끝에 그녀와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충렬사 맞은편 시비엔 당시 아픔을 삼킨 백석의 시 ‘통영2’가 적혀 있다.
"글로 표현 안되는 자연"…"꿈에서도 가고싶은 곳"…문인들이 사랑한 통영
충렬사에서 바다를 향해 내려가면 ‘서피랑 99계단’이 나온다. 동백꽃과 나비가 그려진 이 계단에선 박경리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 된 통영이 내려다보인다. 계단 담벼락을 따라 쓰인 문장들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시내다. 시내 대로에서 왼편으로 꺾어보자. 유치환이 연애편지를 부친 통영우체국이 나온다. 동쪽으로 발걸음을 계속하면 김춘수 생가로 이어지는 골목이 눈길을 잡는다.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 적힌 벽화가 알록달록하다. 언덕 너머 바닷가를 15분여 더 걸으면 유치환의 유품과 원고가 전시된 청마문학관이 있다.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예술의 정취를 느낄 만한 곳으론 미륵산이 가깝다.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면 정상까지 금방 도착한다. 산 전망대에선 정지용의 시비가 등산객을 맞는다. 그가 글로 표현할 수 없다던 한산도 앞바다도 훤하다. 산들바람을 맞으며 북쪽으로 하산하면 전혁림미술관에 닿는다. 코발트블루와 순백으로 빛나는 이 건물엔 민화를 재해석한 전혁림의 강렬한 그림들이 펼쳐져 있다. 맞은편 카페 같은 건물은 지역 명소로 자리 잡은 ‘봄날의책방’이다. 통영에서 나고 자란 문인들의 책, 화가들의 그림을 소담하게 전시하고 있다.

책방에서 나와 봉수골 벚꽃길을 따라가면 바다 쪽이다. 전복을 망태에 싸맨 어민들 사이로 김춘수 유품전시관이 솟아 있는 곳이다. 누레진 원고지에 적힌 날렵한 글씨들을 읽어가면 문구를 고민하던 김춘수의 번뇌가 느껴진다. 전시관에서 도보로 7분 거리인 통영해저터널도 가볼 만하다. 1932년 지어진 이 아시아 최초 해저터널은 별 장식 없이 콘크리트를 둘러친 구조라 당대 독일 모더니즘 건축처럼 간결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낸다.

통영=이주현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