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하룻저녁에 다 연주해? 그걸 해내는 보리스 길트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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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현식의 클래식 환자의 병상일지
보리스 길트버그의 피아노 리사이틀
보리스 길트버그의 피아노 리사이틀
이걸 하룻저녁에 다 친다고?
보리스 길트버그의 지난 4월 24일 리사이틀 프로그램을 본 첫 느낌은 그랬다. 전반부는 쇼팽, 후반부는 라흐마니노프다. 쇼팽은 소나타 2번, 발라드 4번, 스케르초 4번을 치고, 라흐마니노프는 6개의 전주곡과 소나타 2번을 연주한다는 것인데… 쉬어가는 순서가 없어 보였다.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길트버그는 걱정하지 않은 내 판단이 맞았음을 웅변했다.
피아니스트 보리스 길트버그 / 출처. 한경DB
이렇게만 쓰면 '괴력의 연주자' 쯤으로 받아들일 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길트버그의 가장 큰 장점은 음악적 표현력이다. 많은 음표들을 최적의 조합으로 묶어내 이을 건 잇고 끊을 건 끊어서 의미 있는 단위들을 만들고, 그걸 다시 조합해 씨줄과 날줄로 엮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이런 점들이 가장 잘 드러난 대목으로 쇼팽 피아노 소나타 2번 4악장을 꼽고 싶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이 곡의 4악장을 다소 난삽하다 여기고 어려워했다. 길트버그는 그런 나에게 '아, 여기서 여기까지가 하나의 단위이고 또 이건 이렇게 연결되고…' 식으로 차근차근 설명하듯 4악장을 풀어나갔다. 그러면서도 음악의 에너지와 극적 긴장감은 여전히 팽팽하게 유지했다.
리사이틀 커튼콜에서의 보리스 길트버그 / 사진. © 이현식
2부 라흐마니노프 곡들도 벌린 입을 다물 수 없는 연주였다. 특히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은 솜씨 좋은 셰프가 고기를 발골해 요리한 진수성찬이 오감을 팡팡 터뜨리는 느낌이었다. 악보를 질주하면서도 낙차 큰 다이내믹의 변화를 정교하게 다루는 테크닉과 함께, 터치 하나하나를 다듬어내는 기교도 탁월했다. 피아노가 무너져내릴 듯 포르티시모로 때리는 소리도 크되 거칠지 않았다. 힘(力)과 기(技)와 미(美)가 어우러진 연주를 들려줬다.
물 한 모금 마실 사이도 없이 나와서 친 앙코르 첫 곡은 크라이슬러 <사랑의 슬픔>(라흐마니노프 편곡 버전)이었다. 이 곡은 길트버그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 음반에도 수록돼 있다. 우아하고 서정적이면서도 날렵한 연주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래, 이 연주자는 나를 꿈꾸게 만드는 힘이 있구나. 나는 그의 그런 점에 매혹되는 거구나.
4월24일 열린 보리스 길트버그 리사이틀의 앵콜곡 / 사진. © 이현식
리사이틀 장소가 '금호아트홀 연세'여서 애호가 입장에선 장점이 많았다. 아담한 홀 규모 덕분에 독주를 더욱 내밀하면서도 압도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술의전당이나 롯데콘서트홀보다는 주목을 덜 받는 곳이다 보니 인파에 치이지 않은 점도 내 입장에선 좋았지만, 한편으론 아쉬웠다. 연주만 놓고 보면 대형 콘서트홀의 객석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데… 공연시장에서의 매표 실적이 꼭 음악성만 갖고 결정되는 건 아니라 해도 아무튼 안타까웠다.
사인회가 있다 하여 얼른 음반 두 장을 사서 줄을 섰다. 거의 맨 뒤에 섰는데도 금방 내 순서가 왔다. 사람 많은 예당이나 롯데였으면 엄두도 못 냈겠지만 음반에 사인을 받고 함께 셀카도 찍었다. 지난해 5월 IBK홀에서의 실내악 연주 때도 음반 두 장을 샀으니, 길트버그 사인 CD만 네 장이 됐다.
보리스 길트버그 사인 CD / 사진. © 이현식
선 채로 마주한 그는 무대 위에 있을 때보다 더 체격이 작고 여리여리했다. 저런 사람이 거대한 그랜드피아노는 어찌 그리 떡 주무르듯 다루는 건지. 구소련 출신 연주자와 피아노라는 악기의 관계는 미국 흑인과 농구의 관계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길트버그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이현식 음악칼럼니스트
보리스 길트버그의 지난 4월 24일 리사이틀 프로그램을 본 첫 느낌은 그랬다. 전반부는 쇼팽, 후반부는 라흐마니노프다. 쇼팽은 소나타 2번, 발라드 4번, 스케르초 4번을 치고, 라흐마니노프는 6개의 전주곡과 소나타 2번을 연주한다는 것인데… 쉬어가는 순서가 없어 보였다.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길트버그는 걱정하지 않은 내 판단이 맞았음을 웅변했다.

이런 점들이 가장 잘 드러난 대목으로 쇼팽 피아노 소나타 2번 4악장을 꼽고 싶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이 곡의 4악장을 다소 난삽하다 여기고 어려워했다. 길트버그는 그런 나에게 '아, 여기서 여기까지가 하나의 단위이고 또 이건 이렇게 연결되고…' 식으로 차근차근 설명하듯 4악장을 풀어나갔다. 그러면서도 음악의 에너지와 극적 긴장감은 여전히 팽팽하게 유지했다.

물 한 모금 마실 사이도 없이 나와서 친 앙코르 첫 곡은 크라이슬러 <사랑의 슬픔>(라흐마니노프 편곡 버전)이었다. 이 곡은 길트버그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 음반에도 수록돼 있다. 우아하고 서정적이면서도 날렵한 연주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래, 이 연주자는 나를 꿈꾸게 만드는 힘이 있구나. 나는 그의 그런 점에 매혹되는 거구나.

사인회가 있다 하여 얼른 음반 두 장을 사서 줄을 섰다. 거의 맨 뒤에 섰는데도 금방 내 순서가 왔다. 사람 많은 예당이나 롯데였으면 엄두도 못 냈겠지만 음반에 사인을 받고 함께 셀카도 찍었다. 지난해 5월 IBK홀에서의 실내악 연주 때도 음반 두 장을 샀으니, 길트버그 사인 CD만 네 장이 됐다.

이현식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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